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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서 상하이까지 운전을? 순례길서 만난 조안의 정체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36)

“내 아들은 상하이에 있는 대학교에 다녀.”
“아들이 거기 있으니, 너도 상하이에 한번은 가봤겠네?”
“당연하지! 상하이는 일 때문에 자주 가던 곳이야. 아들 입학 첫날도 내가 운전해서 데려다줬는걸. 그 녀석도 항상 내가 운전해주길 바라고. 내가 직접 가는 편이지.”
조안(Joan)은 미국 콜로라도(Colorado)에 산다고 했었다. 그런데 중국 상하이로 직접 운전을 해서 자주 간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어리둥절이다.

멜하다(Melhada)를 출발한 시간은 그믐달이 떠오른 이른 새벽이었다. 헤드랜턴에 의지해 산길을 걷는데 어찌나 으스스하던지. 먼 하늘이 엷은 봉숭아 꽃잎이 열리듯 밝아지며 해가 떠오를 때까지는 무슨 생각으로 걸었는지 기억도 없다. 해가 뜨고 분홍색 하늘 아래 묘지가 보였고 묘지 앞 벤치에서 사과와 샌드위치로 아침을 먹었다. 그때 내 쪽으로 걸어온 두 사람이 고종사촌 관계라는 조안(Joan) 과 페이지(Peige)이다.

아침해가 떠오르는 공동묘지. [사진 박재희]

아침해가 떠오르는 공동묘지. [사진 박재희]

꽁꽁얼린 얼음물과 사과를 넣어 순례자에게 건네준 사람도 있었다. 순례자가 자신을 대신해서 걷는 다고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꽁꽁얼린 얼음물과 사과를 넣어 순례자에게 건네준 사람도 있었다. 순례자가 자신을 대신해서 걷는 다고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좋은 아침, 아름다운 묘지에서 식사 중인 순례자, 만나서 반가워!”
첫 만남부터 활달하고 거침없던 조안과 옆에서 수줍어하는 페이지를 만났다. 순례자들이 만나면 어디서 왔는지 오늘이 며칠째인지를 확인하며 자기소개를 하지만 직업을 묻는 일은 거의 없다. 자주 만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고 오랜 시간 사귄 친구보다 더 잘 알게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순례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직업 따위가 아니라 좀 더 실존적이다.

이를테면 발에 물집이 있는지 없는지 같은 것 말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물집 처지를 해야 하는 조안의 얼굴에는 크고 작은 주름이 가득했다. 활기차게 노년을 맞이한 여인, 조안(Joan)이 상하이까지 운전한다는 말을 했을 때 나는 겨우 자동차를 떠올리며 어리둥절했을까? 그녀가 말한 것은 비행기였다. 조안은 비행기를 운전한다. 30년 차 비행기 조종사로 정년퇴직을 한 후에 특별 계약직으로 아직도 주요 노선을 비행한다는데 조안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 만난 여성 비행기 조종사였다.

“평창은 정말 너무 추웠고 참 아름다웠어.”
한국에 한 번 왔었다는 페이지는 장애인 스키 코치이다. 국가 대표 스키 선수였고, 장애를 가지게 된 친구 때문에 장애인 스키 코치가 되기로 결정했다. 평창 장애인 올림픽에 와서 보낸 시간을 통해 한국 사람들의 정과 따듯함에 반했다는 페이지, 조안 두 자매와 함께 녹아내리는 아스팔트 길을 걸었다.

아게다로 오는 길에서 만난 후 오랜 기간 순례길을 걸으며 친구가 된 콜로라도에서 온 순례자들.

아게다로 오는 길에서 만난 후 오랜 기간 순례길을 걸으며 친구가 된 콜로라도에서 온 순례자들.

아게다 Agueda 대표 이미지, 색색 우산으로 만든 기념품.

아게다 Agueda 대표 이미지, 색색 우산으로 만든 기념품.

코임브라에서 멜하다에 오는 도중에 천사가 레미콘 트럭을 타고 나타나 내게 물을 줬다는 얘기,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을 때 포도를 수확한 노인이 나를 살렸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때 승합자동차가 우리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꽝꽝 얼린 물과 사과로 만든 패키지를 한 사람에게 하나씩 건네주었다. 혹시 이번 주가 천사 출몰의 주간인데 나만 모르고 있었던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안이 왜 모르는 사람들에게 물과 사과를 나눠주는지 물었을 때 그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처럼 걸을 수는 없지만 나는 도울 수는 있으니까요. 순례자를 돕는 것은 순례에 동참하는 거예요. 이걸 준비하면서도 기분이 너무 좋아져요. 겨우 물과 사과를 드리는데 저는 더 많이 받는답니다.”

“와인 테이스팅 하고 가세요~.”
아게다(Agueda)를 향하는 중에 와이너리에 앞에서 여자가 우리를 불러 세웠다. 와인 테이스팅이란 마셔보고 맘에 드는 와인을 사고팔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닌가. 시원한 실내에서 와인을 맛보라니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 우리는 도보 순례중이라 짐이 무거워져서 아무리 와인이 맛있어도 살 수 없다고. 그러니 우리에게는 테이스팅을 시켜도 소용없을 거라고 말하는 내게 그녀는 빨리 들어 오라고 재촉하는 동작을 하며 말했다.

순례자에게는 와인을 팔지않고 맛보기 와인으로 충분히 마시게 해준다. 시원한 실내에서 물수건과 얼음물을 대접해주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

순례자에게는 와인을 팔지않고 맛보기 와인으로 충분히 마시게 해준다. 시원한 실내에서 물수건과 얼음물을 대접해주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

테이스팅 룸에서 조안, 페이지, 수산나.

테이스팅 룸에서 조안, 페이지, 수산나.

“사서 가져갈 수 없으니 여기서 더 많이 드시고 가셔야죠. 들어오세요!”
테이스팅 룸에 들어선 우리에게 시원한 물수건을 건네며 땀을 닦으라던 그녀의 이름은 수산나라고 했다. 골고루 와인을 맛보고 좋다는 와인은 조금씩 더 마시게 해 준 그녀는 아게다 출신이라고 했다.

프랑스 길과 달리 포르투갈 루트는 도시와 도시 사이 공단을, 풍광이 별스럽지 않은 마을과 언덕을 지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진정한 선의와 영감이 가득하다고 느꼈던 이유는 바로 그런 사람들 때문이었다.

순례라고 떠나왔지만 길을 걷는 목적이 무언지 헷갈렸다. 힘들게 걸어서 뭐하나 하는 생각으로 회의감이 들 때도 자주 있다. 하지만 길은 좋은 날이 있으면 힘든 날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어이없이 잘 안 되는 때다 싶다가도 터무니없이 행복해지는 날이 찾아온다는 희망을 가지게 한다. 세상이 너무 영악하고 각박해졌다고 믿는 사람이라 해도 셈조차 없는 호의가 넘치는 사람들을 만남으로써 세상에 기대하지도 못했던 것들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듣지 못했던 것이 들린다.

기업인·여행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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