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볕 더위, 목마름, 굶주림…‘점프 구간’서 만난 두 천사

중앙일보

입력 2019.11.26 13:00

[더,오래]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34)

살다가 오늘 같은 날을 몇 번이나 만날까? 미리 써둔 각본대로 연출된 것처럼 드라마 같은 상황이 펼쳐진 하루. 코임브라(Coimbra)를 떠나 다시 순례를 이어간 오늘이 그랬다.

“포르투(Porto)까지는 버스로 가자! 볼 것도 없고 지루한 길이래.”멸종 공룡처럼 사라졌다고 믿던 낭만이 살고 있는 코임브라에서 사흘을 보내고 출발하는 아침이었다. 프랑스 친구 장루이가 말했다. 평범한 조림지역과 볼 것 없는 내륙 마을을 지나야 하는127km라고. 그런 길을 6일이나 걸어가는 것보다 건너 뛰고 포르투를 며칠 더 즐기는 것이 좋다는 그의 말은 합리적으로 들렸다.

그 날은 미리 써둔 각본대로 연출된 것처럼 드라마 같은 상황이 펼쳐진 하루였다. [사진 박재희]

그 날은 미리 써둔 각본대로 연출된 것처럼 드라마 같은 상황이 펼쳐진 하루였다. [사진 박재희]

버스를 타겠다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파두를 함께 즐긴 줄리가 그랬고 타협없이 걷던 로저마저 버스를 탄다고 했다. 볼만한 풍광도 없고, 특별한 역사가 있는 마을도 아닌 힘들기만 한 지역은 순례자들 용어로 ‘점프 구간’이라고 불린다. 산티아고 가는 길 루트중 부르고스(Burgos)에서 레온(Leon)까지도 일종의 점프 구간이었다. 특히 며칠 동안 하늘 아래 아무것도 없는 메세타(Meseta) 고원지대를 합리성을 추구하는 많은 순례자들이 뛰어 넘는다.

점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고 합리적이지만 그렇게 따지면 애초에 산티아고 길을, 포르투갈을 걸어야 할 필요는 있었단 말인가? 어차피 무용한 순례에서 건강 문제가 아니라면 점프는 내게 선택지가 아니다. 악명 높은 메세타를 걸으면서,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볼 것 없는 구간에서 눈물 콧물 쏟으며 나를 만났던 것처럼 이 ‘걸을 필요 없는’길이 내게 어떤 시간을 줄 지는 모를 일이다. 코임브라에서 함께 보낸 넷 중에 나만 요령없이 걷는 채비를 마쳤다.

시내를 벗어나 첫째 언덕을 숨가쁘게 올라온 후 물통을 흘리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록적 이상기온으로 포르투갈의 가을 아침은 이미 불가마처럼 달아올라 아스팔트를 녹이고 있었는데 가게가 있을만한 마을까지는 한참 남았다. 산업도로 너머로 물류창고 같은 건물만 듬성 듬성보였다. 메세타에 이어지던 밀밭을 상상했는데 여기는 산업공단이다. 물도 한 잔 못 마시고 흘리는 땀은 바로 소금이 되어버렸다. ‘장루이말을 들을껄. 이럴줄 알았으면 그냥 버스타고 갔을거야!’ 처음엔 나 스스로에게 짜증이 났는데 갈증을 넘어 목구멍까지 말라 조여 들자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볼만한 풍광도 없고, 특별한 역사가 있는 마을도 아닌 힘들기만 한 지역은 순례자들 용어로 ‘점프 구간’이라고 불린다.

볼만한 풍광도 없고, 특별한 역사가 있는 마을도 아닌 힘들기만 한 지역은 순례자들 용어로 ‘점프 구간’이라고 불린다.

레미콘 조수석에 태워 공단을 가로질러 물류센터 사무실로 데려간 사람은 레미콘 기사 페르난도다.

레미콘 조수석에 태워 공단을 가로질러 물류센터 사무실로 데려간 사람은 레미콘 기사 페르난도다.

그늘도 피할 수 없는 산업도로를 혼자서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한산하게 비어있던 도로에 레미콘 트럭이 나타났을 때 난 무작정 그 뒤를 따라 뛰었다. 무슨 생각이었는지 레미콘 트럭을 따라 뛰면서 손을 흔들었다. 텅빈 10차선 산업도로에서 레미콘 트럭이 후진하는 것을 본 사람? 나다. 유난히 커다란 레미콘 차였는데 마치 리모트 컨트롤로 움직여지는 물체처럼 육중한 몸짓으로 후진하여 내게 다가 오더니 섰다. 사람이 내렸다. “왜 그래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레미콘 조수석에 태워 공단을 가로질러 물류센터 사무실로 데려간 사람은 레미콘 기사 페르난도다. 사무실 음료대에서 염치 불구하고 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시는 사이 페르난도는 자기의 물통에 생수를 가득 채워 내게 건네줬다. 페르난도에게 약간의 사례금을 주고 싶었는데 반 협박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절했다. 만났던 자리에 나를 내려놓고 돌아가는 그의 레미콘이 뒤뚱거리며 사라질 때 깨달았다. 산티아고 길을 걷는 사람에게는 급하면 천사가 레미콘을 타고도 온다는 것을.

페르난도가 건네준 물도 거의 다 떨어졌는데 상점도 없고 카페도 없는 마을이다.

페르난도가 건네준 물도 거의 다 떨어졌는데 상점도 없고 카페도 없는 마을이다.

푸짐한 점심, 커피와 함께 에그 타르트도 두개쯤 먹겠다는 희망으로 겨우 마을까지 걸어 왔는데,없다. 아침에 챙긴 반쪽 샌드위치로 버티며 한 나절을 보내고 꼬르륵 소리를 낸지도 한참 전부터다. 페르난도가 건네준 물도 거의 다 떨어졌는데 상점도 없고 카페도 없는 마을이라니. ‘아니 이 동네 사람들은 먹지도 않고 사는 거야 뭐야?’ 사람 마음이 이처럼 가볍다. 페르난도를 만난 덕에 길에서 쓰러질 뻔 했다가 살았다며 감사로 가득했던 마음이 허기로 금새 칙칙해졌다.

‘걷기여행 상품으로 만든 길이 아니잖아. 내 기준대로 적당한 거리마다 카페나 상점이 있을 수는 없다구.’ 불평말고 걷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레미콘을 타고 나타났던 천사 페르난도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리는데 등뒤에서 누가 부른다.“헬로우 페레그리나~”

산타클로스처럼 생긴 할아버지는 차를 세우더니 내게 포도 두 송이를 내민다. 햇살 같은 웃음과 함께. 거짓말 같은 타이밍이다.

산타클로스처럼 생긴 할아버지는 차를 세우더니 내게 포도 두 송이를 내민다. 햇살 같은 웃음과 함께. 거짓말 같은 타이밍이다.

경운기에 수확한 포도를 가득 싣고 가는 할아버지였다. 산타클로스처럼 생긴 할아버지는 차를 세우더니 내게 포도 두 송이를 내민다. 무어라 말을 하더니 내가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을 눈치챈 할아버지는 포도를 송이째 들어올려 먹는 시늉을 하며 포도를 안겨주었다. 햇살 같은 웃음과 함께. 거짓말 같은 타이밍이다. 목이 말라 헛것이 보이던 시점에는 무려 레미콘을 몰고 천사가 나타나 구해주었는데 배가 고파 눈이 푹 꺼지는 것 같은 지금 경운기를 타고 나타난 천사가 포도를 건네다니. 포도는 달라붙었던 위장을 채우고 감기던 내 눈을 뜨게 해주었다.

종일 순례자를 만나지 못했는데 목적지 멜하다(Melhada)를 앞두고 길을 헤매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지냐(Genia)를 만났다. 하마터면 6km나 돌아야 했는데 운 좋게 지냐를 만나 길을 찾았다. 오늘만 세번째 천사다.

“불볕 더위에 점프구간을 굳이 걷는 사람인데 당연히 천사가 구해주시지!” 지냐는 내가 만난 페르난도, 경운기 할아버지 얘기를 듣더니 까미노에 정말 천사가 있다며 맞장구를 쳤다. 여기까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날은 예고편이었다. ‘굳이 걸을 필요가 없는 길’을 걷는 동안 내게 거짓말 같은 행운은 줄줄이 사탕으로 이어졌다. 그날 지냐가 들려준 우크라이나 속담을 나는 자주 떠올린다. “정말 소중한 것이라면 빠른 길에는 놓여 있지 않다.”

기업인·여행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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