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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표를 버렸다, 이스탄불에서 새로운 여행이 시작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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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33)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 한껏 부풀어 하늘을 날던 마음은 터키에 도착 후 얼마 되지 않아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후루룩 바람이 빠져버렸다. 실망스럽다거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다.

터키는 터키에서만 볼 수 있는 유물로 가득한 박물관 천지다. 로마유적이 로마보다 더 많이 남아있고 흔히 ‘그리스 문명’이라고 부르는 인류 문명이 발생하고 꽃피운 지역은 대부분 터키에 속해있다. 나라 전체가, 숨 쉬는 것만으로도 수천 년 시간 속 생생한 역사여행이 되는 땅이 시시할 수는 더더욱 없질 않은가. 이유를 알 수 없는 무기력이었다.

책장에는 터키에 관한 책이 늘었지만 여행은 번번이 미뤄졌다. 터키는 오랫동안 내게 허락되지 않는 곳이었다. 그렇게 꿈꾸던 터키에 갔지만 나는 마냥 기쁘지 않고 초조했다. 터키 이스탄불. [사진 박재희]

책장에는 터키에 관한 책이 늘었지만 여행은 번번이 미뤄졌다. 터키는 오랫동안 내게 허락되지 않는 곳이었다. 그렇게 꿈꾸던 터키에 갔지만 나는 마냥 기쁘지 않고 초조했다. 터키 이스탄불. [사진 박재희]

마음으로는 이미 수 십번도 넘게 다녀왔을 만큼 나의 ‘터키 앓이’는 오래된 것이다. 출장차 이스탄불에서 며칠 보낸 후에 생긴 증세는 점점 심해졌다. 매년 터키 행을 계획했지만 이상하게 터키는 나와 인연이 닿질 않았다. 거짓말처럼 떠날 수 없는 일들이 생겼다. 엄마이자 아내, 직장인으로 사는 내가 밀칠 수 없는 일들이 닥쳤다.

매년 책장에는 터키에 관한 책이 늘었지만 여행은 번번이 다음으로 미뤄졌다. 터키는 오랫동안 내게 허락되지 않는 곳이었다. ‘그렇게 꿈꾸던 곳에 내가 있는 거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하늘을 날 것 같았잖아. 드디어 여기에 왔어!’ 혼잣말도 하며 애써봤지만 내 안의 나는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초조했다.

카메라가 문제인 걸까? 눈으로 보는 대로 찍히질 않았다. 사진 찍을 욕심으로 메모리칩도 가장 큰 것으로, 충전기에 밧데리도 여분을 사서 챙겼건만 보는 대로 찍히질 않으니 소용이 없었다. 맹렬하게 찍으면 찍을수록 불안해졌다.

눈에 보이는대로 사진이 찍히지 않았다. 메모리도 가장 큰 것으로 챙겼건만 보는대로 사진이 찍히질 않으니 소용이 없었다. 문득 '지금 뭐 하는 거니?'라는 생각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금호수. [사진 박재희]

눈에 보이는대로 사진이 찍히지 않았다. 메모리도 가장 큰 것으로 챙겼건만 보는대로 사진이 찍히질 않으니 소용이 없었다. 문득 '지금 뭐 하는 거니?'라는 생각과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소금호수. [사진 박재희]

터키 여행의 첫 번째 보석이자 관문인 이스탄불 탐방은 끝내기 어려울 만큼 볼 것이 많다. 성소피아와 톱카프 궁전, 고고학 박물관과 이슬람박물관, 파노라마 역사박물관에 모자이크 박물관을 돌았다.

며칠째 되던 날 파김치가 되어 숙소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돌무쉬(터키의 미니버스)에 있는데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뭐 하는 거니? 뭐 때문에 이러는 거야?” 그동안 고요하게 아무런 대꾸도 없던 내 안의 다른 내가 마침내 쏟아낸 책망이었다. ‘이건 아니야!’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해야 할까.

책과 사진으로 보면서, 심지어 상상만으로도 전율케 하던 모든 것들을 정작 이곳에서 만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평가와 채점을 앞두고 과제를 받은 사람처럼 나는 열심히 노트하고 사진을 찍고 스케치를 남겼다. 여행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사람처럼 움직이고 있었을 뿐 나는 그동안 열망하던 것들을 바라보지도 느끼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생2막, 진짜 하고 싶은 일, 꿈을 기억해내는 희망에 대한 타자의 반응은 일관되었다. ‘복에 겨운 소리’를 하는 ‘팔자 편한 여자’ 취급을 받으며 마취된 꿈을 빙빙 돌다가 터키로 떠나온 것이다. 괴레메 스머프마을. [사진 박재희]

인생2막, 진짜 하고 싶은 일, 꿈을 기억해내는 희망에 대한 타자의 반응은 일관되었다. ‘복에 겨운 소리’를 하는 ‘팔자 편한 여자’ 취급을 받으며 마취된 꿈을 빙빙 돌다가 터키로 떠나온 것이다. 괴레메 스머프마을. [사진 박재희]

“어떻게 하니 재희야. 영미가 죽었대.” 늦어진 회식에서 돌아와 막 침대에 누웠던 날, 깊은 밤 벼락처럼 소식을 전한 친구는 전화기 뒤에서 한참 동안 울기만 했다. 겨우 말을 이은 친구는 영미의 사인이 뇌출혈이라고 했다. 회식 중에 너무 피곤하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고 했다. 회식을 마친 후 영미의 동료가 주차장에서 그녀의 차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차 속에 앉아 이른바 골든타임을 놓친 후였다고.

영미는 내 고등학교 동창이고 대학 4년 동안 같은 과, 같은 동아리로 한 몸처럼 붙어 다녔던, 요즘 말로 절친이다. LA로 이주한 그녀를 보스턴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났던 것이 불과 2주 전이다.

슬프다기보다 그저 멍했다. 투병 중이었거나 교통사고였다면 차라리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기 쉬웠으려나? 회식 중에 뇌출혈로 죽은 내 친구의 죽음은 그럭저럭 참아지던 일상의 진부함을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그날부터 ‘한 번뿐인 삶’, ‘내일 죽는다 해도 난 오늘처럼 살고 싶을까’ 에 대한 생각은 끝이 없는 도돌이표로 의문부호를 찍었고 영미와의 마지막 브런치가 자꾸 생각났다. 공항으로 달려와 나를 데리고 라구나 비치로 달려가 둘이 맛있게 호박파이를 먹고 난 후 그녀가 물었더랬다.

“넌 인생 후반엔 어떻게 살고 싶어? 하고 싶은 게 뭐야?”
20년 넘게 교사로 살던 그녀가 ‘드라마 스쿨’에 등록했다며 내게 새로운 꿈을 물었을 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기분이란 무참했다. 세상이 예정하고 기대하는 대로 살고 싶지는 않은데 다른 앞길은 보이지 않아 막연하고 막막했던 여름이었다.

인생2막, 진짜 하고 싶은 일, 꿈을 기억해내는 희망에 대한 타자의 반응은 일관되었다. ‘복에 겨운 소리’를 하는 ‘팔자 편한 여자’ 취급을 받으며 마취된 꿈을 빙빙 돌다가 터키로 떠나온 것이다.

숙소로 돌아온 후 한국에서 적어 온 '가봐야 할 곳 리스트'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해야 할 것'이란 먼저 한 그들이 정한 것이다. 일정표 없이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카파도키아. [사진 박재희]

숙소로 돌아온 후 한국에서 적어 온 '가봐야 할 곳 리스트'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해야 할 것'이란 먼저 한 그들이 정한 것이다. 일정표 없이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카파도키아. [사진 박재희]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이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나짐 히크메트

숙소로 돌아온 후 한국에서 빽빽하게 적어 온 ‘가봐야 할 곳 리스트’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꼭 가봐야 할 곳’이란 이미 ‘다른 사람이 가본 곳’일 뿐이다. ‘해야 할 것’이란 먼저 한 그들이 정한 것이다. 일정표도 없이 출발이 가장 빠른 버스를 타고 다른 도시로 가보는 무모한 나를 만나고,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곳을 지나며 마주한 장엄한 풍광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 된다.

해가 뜨는 것을 바라보며 지중해에서 수영을 했다. 수영 실력이 별로인지라 첨벙첨벙 바닷물에 몸을 부딪는 시간이었지만 내 평생 처음으로 했던, 하고 싶은지도 알지 못했던 해맞이 바다 수영이었다. 다시 심장이 뛰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손바닥에 피돌기가 느껴진다. 다시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고 있다.

기업인·여행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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