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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의 공정위’된 국민연금…기업들 “투자할 돈 방어에 쓰게 될 것” 한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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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의 ‘적극적 주주활동 지침’이 당장 내년 3월 주주총회부터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면서 기업들은 늘어난 경영 변수에 곤혹스러워하는 분위기다. 지침대로라면 국민연금은 기업의 ▶배당정책 ▶임원보수 ▶법 위반 우려 ▶환경·사회·지배구조(ESG) 평가 등을 문제 삼아 대표이사를 포함한 이사회 이사 해임은 물론 정관 변경까지 요구할 수 있다.

국민연금 주요기업 지분율.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국민연금 주요기업 지분율.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보유 상장사 10곳중 4곳이 ‘사정권’ 

국민연금이 경영권 개입이 가능한 지분 5% 이상을 가진 기업은 273곳(한국경제연구원, 2018년말 기준)이다. 국민연금이 주식 의결권을 보유한 국내 상장사(716곳)의 40%에 달한다. 국민연금을 ‘한국 경제의 지주회사’라고 부르는 이유다. 지난 9월말 기준으로 포스코(11.72%), 네이버(11.10%), 삼성전자(10.49%), 현대자동차(10.35%), LG화학(10.28%), ㈜GS(10.10%) 등 주요 대기업 지분율만 봐도 상당하다.

상장사 영향력 큰 국민연금.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상장사 영향력 큰 국민연금.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정부는 ‘나쁜 기업’에만 제동을 걸겠다고 하는데 재계는 왜 우려하는 걸까. 기업 관계자들은 29일 익명을 전제로 다음과 같은 걱정을 전했다.

① “사정 천차만별, 최선의 판단할 수 있나” (지주사 A)

"기업은 살아있는 생명체다. 뇌종양이 있다고 뇌를 전부 드러내나. 경영인이 중요한 계열사를 살리기 위해 다른 계열사 자금을 이용했다고 하자. 배임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경영인이 기업의 가치 증대에 큰 역할을 하는 경우 무조건 범죄인 취급을 해서 끌어내리는 맞을까. 기업은 수많은 국내외 변수에서 생존을 고민한다. 국민연금의 ‘정의로운’ 개입이 기업 가치를 한순간 떨어뜨리고 수많은 주주들에게 피해를 안길 수 있다. 국민적 분노를 달래고 사회적 카타르시스를 줄 수 있을지 몰라도 그 결과는 기업과 시장과 주주들에 최선이 아닐 수 있다."

② “국민연금 왜 제2공정위 되려하나” (10대 대기업 B)

"횡령·배임·사익편취·부당지원 등으로 죄를 인정받은 경영진을 배제할 수 있다. 하지만 법 위반 ‘우려’만 가지고 경영에서 물러나게 한다면 무죄추정의 원칙에도 어긋난다. 기업의 횡령·배임은 변수가 많아 의도를 판단하기 어려워 사법부에서 신중히 판단을 받는 건데 이제 사회적 물의만 빚어도 당장 표적이 되게 생겼다. 최근 오너가 검찰 조사를 받은 효성이나 대림, 오너 갑질 이슈에 최근 가족간 분쟁이 표면화한 한진 등은 당장 국민연금 개입 가능성이 커졌다. 이미 공정거래위원회·국세청·금융감독원·사법부 등 기업의 비위를 감시하고 규제하는 기관들이 있다. 국민의 노후자금 증식이 제 1목적인 국민연금이 왜 제2의 공정위가 되려 하나."

③ “사업·고용에 쓸 돈 방어에 써야 하나” (IT분야 C기업)

"지침을 따르고 싶어도 너무 모호하다. ‘부실한 배당’이나 ‘과도한 임원 보수’가 문제가 된다는데 명확한 기준이 없다. ‘기업 가치를 훼손하거나 주주권익을 침해할 우려가 발생한 경우’라고 하는데 이게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설명이 없다. 하지만 경영참여 시그널(신호)은 강한만큼 대비를 하긴 해야 한다. 결국 신사업 투자 등 질적 성장에 투자할 돈을 지배구조 방어나 컨설팅, ESG 평가 대비를 위해 쓸 수밖에 없다. 지침이 모호하니 이슈가 생길 때마다 대응책을 세워야 한다. 국민연금이 마치 외국계 행동주의 펀드처럼 국내 기업을 공격하는 느낌마저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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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이 수장, ‘독립성’부족에 지침마저 모호  

당사자인 기업 관계자가 아닌 전문가들이 꼽는 가장 큰 문제점은 국민연금의 취약한 ‘독립성’이다. 주주권 행사를 결정하는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기금위)의 위원장은 보건복지부 장관이다. 전체 20명 위원 중 현직 장·차관이 5명이고 국민연금공단 이사장도 당연직으로 참가한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해외 연기금이 경제·금융 전문가로 구성된 반면, 국민연금은 정부 인사들이 움직이고 있어 정치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이어 “주주의 의결권 행사는 세계적인 추세지만 국민연금은 자기 돈이 아닌 ‘국민의 돈’이라는 점에서 주주라고 하기도 어렵다”며 “2050년대 국민연금이 고갈된다는데 이에 대한 대응책을 세우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국민연금 주주권행사 분야를 연구해 온 곽관훈 선문대 법경찰학과 교수는 “정부 인사와 비전문가 위주인 기금위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잣대로 의결권을 행사해 기업이 타격을 입고 문제가 발생하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곽 교수는 이어 “국민연금은 권리 행사를 책임 이행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소아 기자 ls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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