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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할머니, 페루 아들…명근씨를 일으킨 '5달러의 기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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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향림원에 살면서 헬렌 할머니에게 후원을 받던 시절 김명근(왼쪽)씨. 헬렌 할머니는 김씨 외에도 여자아이(오른쪽) 한 명을 더 후원했다고 한다. [사진 컴패션]

대전 향림원에 살면서 헬렌 할머니에게 후원을 받던 시절 김명근(왼쪽)씨. 헬렌 할머니는 김씨 외에도 여자아이(오른쪽) 한 명을 더 후원했다고 한다. [사진 컴패션]

“그때 동물원에서 기린 본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요”

올해 예순살인 김명근 씨는 50여년 전 서울에서 보낸 사흘을 잊을 수 없다. 대전에 있는 보육원에서 지낸 그가 서울 구경을 할 수 있었던 건 미국인 할머니 헬렌 덕분이었다.

어린 명근 씨에게 환상적인 시간이었다. 그는 “기차도 처음 타봤고 호텔도 처음 가봤다”며 “할머니와 한방에서 지냈는데 포크·나이프 쓰는 법을 일일이 알려주고 연신 음식을 먹여주셨다. 내 입가를 닦아주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했다.

그는 세 살 때 대전시에 있는 ‘향림원’이라는 보육 시설에 맡겨졌다.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곳에서 보낸 그는 매달 5달러를 받았다.

과거 보육원에서 자란 김명근(60)씨는 지금 페루에 한 아이를 후원하고 있다. 그는 "미국 할머니에게 받은 은혜를 돌려주고 싶어 기부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사진 컴패션]

과거 보육원에서 자란 김명근(60)씨는 지금 페루에 한 아이를 후원하고 있다. 그는 "미국 할머니에게 받은 은혜를 돌려주고 싶어 기부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사진 컴패션]

보육원 측이 국제어린이양육기구 ‘컴패션’과 연계해 김씨에게 주던 후원금이었다. 보육원 선생님은 “저 멀리 미국이라는 곳에서 헬렌 할머니라는 분이 보내 주신 돈”이라고 알려줬다. 김씨는 “40~50년 전 5달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한 5만원 될 것 같다”고 했다.

미국 할머니 덕에 ‘집 잘 사냐’ 소리 듣기도  

정기적인 후원금 외에도 크리스마스나 김씨의 생일 때는 옷이나 장난감 같은 선물이 빠짐없이 도착했다. 한국에서 찾기 힘든 장난감도 많았다.

움직이는 기차를 받은 적도 있고 정장에 나비넥타이까지 달린 멋진 옷도 있었다. 그는 “그 옷을 입고 학교에 가면 애들이 몰려들어서 ‘넌 집이 잘사냐’고 물어보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명근 씨를 후원한 미국 헬렌 오더하이드(Hellen Auderheide) 여사의 모습. [사진 컴패션]

김명근 씨를 후원한 미국 헬렌 오더하이드(Hellen Auderheide) 여사의 모습. [사진 컴패션]

헬렌 할머니가 한국을 찾은 건 김씨가 6살때 쯤이었다고 한다. 그를 직접 만나기 위해서였다.

명근 씨는 노란 머리 할머니의 손을 잡고 서울 창경원(현 창경궁)에 있는 동물원도 가고 남산도 둘러봤다. 김씨는 “태어나서 처음 본 기린이 얼마나 큰지, 우리 반이 60명이 넘었는데 직접 본 사람은 나뿐이었다”고 말하며 밝게 웃었다.

5달러는 내게 ‘작은 기적’

헬렌 할머니의 5달러는 그에게 작은 기적이었다. 그가 고등학생 때 학생들 사이에서는 ‘파커 만년필’이 유행이었다.

40여년 전 후원자 헬렌 할머니가 김명근 씨에게 준 슬라이드 환등기와 필름이다. 헬렌 할머니는 91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 김씨에게 '큰 꿈을 갖고 살기 바란다'는 편지와 함께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직접 찍은 사진이 담긴 3000여개의 슬라이드 필름을 선물로 보냈다. [사진 컴패션]

40여년 전 후원자 헬렌 할머니가 김명근 씨에게 준 슬라이드 환등기와 필름이다. 헬렌 할머니는 91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 김씨에게 '큰 꿈을 갖고 살기 바란다'는 편지와 함께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직접 찍은 사진이 담긴 3000여개의 슬라이드 필름을 선물로 보냈다. [사진 컴패션]

가난한 학생에게 고가의 만년필은 언감생심 넘볼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는 보육원 교사에게 며칠을 졸라 후원금으로 만년필을 샀다.

만년필을 교복 윗주머니에 넣고 등교한 날, 65명이던 그의 반 친구들이 김씨 앞에 줄을 섰다고 했다. 김씨는 “만년필 있던 친구가 우리 반에 10명도 안 됐다. 정말 정말 갖고 싶었다”며 “가난하면서 사치 부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작은 행복이 가난에 파묻히지 않도록 날 지켜준 것 같다”고 말했다.

고등학교를 마친 시점에서 후원도 ‘졸업’해야 했다. 컴패션은 후원받은 사람이 자립할 수 있도록 일정 시점이 지나면 후원을 졸업하는 제도를 운용했다.

대학을 나오고 직장에 들어간 김씨는 자립에 성공했다. 농업 기술 전문가로 활동하며 1992년 사우디아라비아에 3년간 다녀오기도 했다.

이후에도 방송통신대 친구들과 봉사 단체를 만들어 매달 둘째 주 일요일마다 향림원을 찾았다. 지난날 받은 5달러의 기억이 돌아온 건 보육원 원장에게 컴패션에 대한 정보를 다시 듣고 나서였다.

페루 아들이 보낸 편지에 울컥

김씨는 2009년부터 페루에 있는 세르히오(당시 8세)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그는 “어린 시절 나를 똑 닮은 아이 사진을 보고 ‘헬렌 할머니처럼 한 사람이라도 끝까지 책임지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명근씨(왼쪽)의 어린시절과 그가 후원하는 페루의 세르히오 모습이다. 50여년 전 컴패션의 후원을 받았던 김씨는 2009년부터 페루의 세르히오에게 10년 간 후원금을 보냈다. [사진 컴패션]

김명근씨(왼쪽)의 어린시절과 그가 후원하는 페루의 세르히오 모습이다. 50여년 전 컴패션의 후원을 받았던 김씨는 2009년부터 페루의 세르히오에게 10년 간 후원금을 보냈다. [사진 컴패션]

세르히오는 지난해 12월 마지막 후원을 받고 ‘졸업’했다.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싶다던 8살 꼬마는 마침내 대학에 들어갔다.

10년 정도 매달 4만5000원의 후원금을 보낸 김씨는 아들을 대학 보낸 기분이었다고 한다. 세르히오의 마지막 편지에는 “한국에 계신 아버지. 더는 편지나 크리스마스 카드를 주고받거나 특별한 날을 기념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는 늘 제 맘 속에 있을 거예요. 사랑합니다”라고 적혀있었다.

김씨는 다른 페루 아이에게 계속 후원을 하고 있다. 이번달 은퇴하는 그는 “내년에는 페루에 직접 가서 이 아이와 함께 마추픽추에 가려 한다”며 “헬렌 할머니처럼 나도 꼭 그 아이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기부나 봉사활동을 망설이는 이들에게 그는 “중간에 후원을 멈추면 아이들이 상처받을까 봐 걱정하는 사람도 많은데 일단 한 번이라도 해보길 권한다”며 “망설이면 아무것도 안 된다. 작아 보이는 5달러나 2만~3만원이 누군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장난감 기차’나 ‘만년필’처럼 작은 기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태윤 기자 lee.tae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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