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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 늙었다"···푸틴·트럼프 사이 웃음 잃은 '코미디언 대통령'

중앙일보

입력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코미디언 출신의 1978년생 대통령의 어깨엔 무거운 짐이 얹혀있다. 사진은 지난 6월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서 기자회견하는 모습. [EPA=연합뉴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코미디언 출신의 1978년생 대통령의 어깨엔 무거운 짐이 얹혀있다. 사진은 지난 6월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서 기자회견하는 모습. [EPA=연합뉴스]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인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41)에게 2019년은 잊지 못할 한 해다. 4월, 대통령 선거에 당선됐다. 70%가 넘는 압도적 지지를 얻고 당시 현직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7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통화를 했다. 이 통화로 인해 11월, 미합중국의 대통령이 탄핵 위기에 몰린다. 12월, 우크라이나의 핵심 요충지인 크림반도를 침공했던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담판을 짓는다.

이 8개월 사이, 젤렌스키는 변했다. 그를 4월에 이어 11월말에도 인터뷰했던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의 사이먼 슈스터 기자는 최근호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팍 늙었다.” 슈스터는 이어 젤렌스키의 노화가 “8개월 동안에 진행된 거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심했다”고 적었다.

당선 직후, 환호하고 있는 젤렌스키. 좋았던 때다. [로이터=연합뉴스]

당선 직후, 환호하고 있는 젤렌스키. 좋았던 때다. [로이터=연합뉴스]

4월 대선 압승 후 인터뷰를 찾아보니 승리에 들뜬 젤렌스키는 AP통신에 이런 말을 남겼다. “우리를 보라. 우리가 못할 것은 없다. 무엇이든 가능하다.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다.”

8개월 후, 상황은 달라졌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의 대통령 집무실에서 타임지 기자를 만난 젤렌스키의 말이다. “난 이 집무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한다. 내겐 요새와 같은 곳이다. 탈출하고만 싶은 요새.”

꿈꿔왔던 대통령직이지만 그는 지쳤다는 걸 숨기지 않는다. 그도 그럴법한 것이, 그는 세계의 스트롱맨(strongmanㆍ독재자 또는 강력한 권위를 내세우는 지도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두 명 사이에 낀 처지다. 미국의 트럼프와 러시아의 푸틴이다.

어쩌다 미국 탄핵 드라마 주인공으로  

트럼프 대통령을 둘러싼 스캔들의 핵심은 올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푸틴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탄핵 절차를 촉발시킨 건 젤렌스키와 트럼프의 7월 통화 내용이 폭로되면서다. 푸틴은 최근 모스크바에서 열린 한 회의 공개석상에서 “이젠 아무도 우리를 탓하지 않고 우크라이나를 탓하고 있다”며 “신에게 감사할 일”이라고 말했다.

탄핵을 둘러싼 의혹은 핵심은 트럼프 대통령이 7월 통화에서 자신의 정적(政敵)인 조 바이든 민주당 대선후보의 아들이 관여된 우크라이나 관련 의혹을 수사해달라면서, 응하지 않을 경우 우크라이나에 대한 4억 달러(약 4644억원)에 달하는 군사원조를 끊겠다고 한 것이다.

블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EPA=연합뉴스]

블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EPA=연합뉴스]

젤렌스키와 그의 참모들은 죽을 맛이다. 젤렌스키가 코미디언이자 배우였던 시절부터 법률 자문을 맡았던 안드리 예르막 보좌관은 타임지에 “우리는 몸을 한껏 낮추고 있다”며 “탄핵을 둘러싼 미국 국내 정치 싸움에 우리가 휘말리는 것을 피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젤렌스키는 지난 4월 대선 운동 중 타임지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어떤 사람이에요? 정상적 사람인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어 “뭐, 알게 되겠지, 트럼프 대통령과 잘 지낼 거라고 믿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상황은 정반대가 된 셈이다.

미국 탄핵 정국에 대해 젤렌스키 본인은 타임지에 많은 말을 내놓지 않았다. 대신 “탄핵 정국에서 나에게 나올 질문에 답하는 건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타임지는 “그와 인터뷰하면서 미국 탄핵 문제는 사실 작아 보였다”고 평했다. 그럼 뭐가 중요한 걸까. 푸틴 대통령과의 기 싸움이다.

우크라이나 vs 러시아의 지난한 싸움  

러시아는 2014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유럽으로 가는 관문인 크림반도를 손에 넣기 위해서다. 크림반도를 점령한 러시아는 크림공화국을 세우고 러시아 연방에 편입시켰다. 미국과 유엔이 제재를 가하며 우크라이나를 지원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러시아는 소비에트연방 붕괴 이후 수년간 우크라이나를 호시탐탐 노려왔다. 수 세기에 걸쳐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대유럽 정책에 갖는 중요성은 컸다. 블라디미르 레닌도 “우크라이나를 잃으면 러시아는 머리를 잃는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뒤)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 지난 9일 파리에서 회동하는 사진이다. [연합뉴스]

젤렌스키 대통령(뒤)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 지난 9일 파리에서 회동하는 사진이다. [연합뉴스]

2014년 충돌의 여파는 현재 진행형이다. 현 갈등의 상징은 ‘돈바스’로 요약된다. 돈바스는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으로, 우크라이나 정부군 대(對)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친러 분리주의 반군의 무력 분쟁이 진행 중이다. 젤렌스키가 “우리는 지금 전쟁 중이다”라며 “미국 탄핵 정국에 휘말릴 여유가 없다”고 강조하는 배경이다.

그래서 젤렌스키에겐 지난 9일(현지시간)이 중요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푸틴 대통령과 담판을 벌인 날이어서다. 2014년 러시아의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푸틴과 직접 면대면 담판을 벌인 것은 처음이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가운데)이 푸틴 대통령 등과 만난 뒤 승리의 V자를 들어보이고 있다. 오른쪽은 대화를 중재한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 [연합뉴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가운데)이 푸틴 대통령 등과 만난 뒤 승리의 V자를 들어보이고 있다. 오른쪽은 대화를 중재한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 [연합뉴스]

중재자 역할로 프랑스의 엠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함께 했다. 회담 결과는 일단 젤렌스키에겐 나쁘지 않았다. 회담에서 푸틴은 ”올해 말까지 휴전을 위한 모든 필수적 조치를 이행하기 위해 보강된 전면적 휴전 협정을 이행할 것을 보장한다”는 합의문에 서명했다. 푸틴은 이어 “러시아는 돈바스 분쟁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 약속했다. 포로 석방 및 교환에도 원론적 합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휴전을 넘어선 실질적 종전을 위한 핵심 조치는 미제로 남았다. 젤렌스키가 앞으로 해결해야 할 주요 과제다.

대통령이 되고 배운 교훈: 아무도 믿지 마  

젤렌스키 대통령은 예전만큼 웃지 않는다고 한다. 타임지는 “그는 한때 기성 정치인들이 냉소주의가 너무 심하다고 비판했지만 이젠 그도 (냉소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적었다. 그가 요즘 자주 하는 말은 “아무도 믿을 수 없다”라고 한다.

우크라이나는 인구 4400만명에 남한의 여섯배에 달하는 국토와 각종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다. 그러나 현재 국가 경제 규모는 세계 57위에 불과하다(GDP 기준). 젤렌스키는 기존 정치에 대한 염증을 원동력으로 당선됐으나 국내 정치에 앞서 국제 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있다. 그런 그를 응원하는 듯 타임지는 이렇게 썼다.

“젤렌스키가 강조하는 건 우크라이나가 독립된 국가라는 점이며, 단지 해외의 제국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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