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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白手의 정신' 바로 세워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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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백수(白手)란 누구인가. 말 그대로 하얀 손을 가진 사람이다. 어째서 하얀 손을 가졌느냐고? 손에 얼룩이나 먼지 묻히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손을 더럽히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에는 졸부도 있고, 반대로 거지도 있기 때문이다. 백수라는 말 뒤에는 본래 건달이란 말이 따라다닌다.

마를 건(乾) 자에 통달할 달(達) 자. 국어사전에는 '빈 주머니로 난봉을 부리고 돌아다니는 사람'이라고 풀이돼 있다. 비슷한 말에 선달(先達)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문무과에 급제하고 아직 벼슬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돼 있다.

대동강 물을 팔아먹었다는 봉이 김선달이 그런 사람이다. 고등 실업자라고나 할까. 다시 백수란 누구인가. 마음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존재이면서도 몸은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존재다.

평소에 내가 존경하는 마음을 품어온 어떤 분이 무례하게 밀고 들어오는 권부의 요청을 한 마디로 거절하면서 "이놈들이 백수 무서운 줄 몰라가지고!"라는 농담을 던졌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다(나는 배를 잡고 웃었다).

백수의 손이 하얀 것은 손을 더럽히는 일을 하지 않기 때문인데, 물론 여기에는 백인백색의 사연이 있을 수 있으나 그들이 손을 더럽히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배수의 진을 치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백수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배수의 진이다.

그러고 보면 백수의 정신이란 바람직한 인문정신(人文精神)과 닮아 있다. 무엇보다 그것은 부(富)와 권(權)에 대한 성찰적인 소신을 가다듬음으로써 자신의 손을 스스로 더럽히지 않을 수 있는 내공을 기르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남산골 딸깍발이 샌님이나 창백한 인텔리겐치아의 흰 손처럼 지난 세기의 역사에 의해 백수에게 뒤집어씌워진 누추함을 유쾌한 자부심으로 씻어내는 것이다.

오늘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고려하는 것'이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고려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정치다. 적어도 내가 배운 이상적인 정치란 그런 것이었다.

정치에 마키아벨리즘이니, 제왕의 도니 하는 술(術)이 비집고 들어설 자리가 마련된 것도 서로 상충하는 부분들의 이해를 전체의 차원에서 조정해야 할 필요성이 양해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의 정치가 '전체에 앞서 부분들의 이해를 고려하는 것'으로 전락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무엇보다 정치인 가운데 백수의 정신을 지닌 사람이 드문 데다, 일반 국민 역시 정치를 그런 식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백수의 정신이란 무엇보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고려하는' 시야를 지닌 것이다. 그것은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배반하는 무엇이 될 수도 있다.

이제 중진국에서 선진국의 대열로 접어들었을 뿐 아니라 대중의 지적 수준이 갈수록 높아지는 지식사회로 접어든 우리나라는, 굳이 불황이 아니더라도 만성적 실업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들어섰다.

따라서 이제는 일자리를 늘리는 일이나 사회복지의 측면에서뿐 아니라 백수의 정신 자체에 대해서도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당신이 백수인가, 그렇다면 백수라는 사실에 대해 주눅들지 말고 정면으로 돌파하라.

당신은 백수가 아닌가, 그렇다면 백수를 향해 눈을 내리깔지 말고 옥석을 가려 그에 합당한 대접을 하라. 백수를 산업예비군으로만 보던 시각은 하나의 측면만을 절대시하던 지난 시대의 산물이다.

그러고 보면 공자도, 예수도, 석가도, 노자도 다들 백수정신의 소유자였다.'부분이 아닌 전체를 고려하는' 시야 속에만 창조적인 지성이 깃들일 수 있다. 백수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며, 백수 문화지대본(文化之大本)이다. 백수의 정신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

강영희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