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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가장 위험한 적, 민주 위해 투쟁한다는 사람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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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9일 서울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서 강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9일 서울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서 강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주의의 가장 위험한 적대자는 스스로 민주주의자라고 생각하면서, (민주주의를 위해 본인이) 투쟁한다고 확신하는 이들이다.”

최장집 ‘DJ 노벨상 학술회의’ 강연 #386이 정치계급으로 오른 상황 #민주주의 위협하는 정치 만들어 #위기 본질은 진보의 도덕적 파탄 #386을 진보라 할 수 있는지 의문 #‘강남좌파’는 현실 변화 모르고 #30년 전 사고 냉장고서 끄집어내

정치학자 후안 린츠의 경구(警句)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9일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다. 위기의 본질은 한국진보의 도덕적, 정신적 파탄”이라며 이를 인용했다. 이날 오후 1시 30분부터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19주년 학술회의’ 기조 강연문 ‘한국민주주의의 공고화, 위기, 새 정치 질서를 위한 대안’을 통해서다. 그는 “(집권 세력이) 민주화 이전으로 회귀해 역사와 대결하는 것이 근본 원인”이라며 “적폐 청산 열풍은 민주화 이전의 민주주의관으로 회귀했음을 말해준다”고 지적했다.

MB 때 노무현 수사가 위기의 출발점 

10월 9일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조국 퇴진’ 집회. 우상조 기자

10월 9일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조국 퇴진’ 집회. 우상조 기자

그는 민주주의 위기의 상징적 장면으로 10월 ‘조국 사태’ 당시 광화문과 서초동에서 있었던 조국 찬반 집회를 꼽았다. ‘종교 전쟁’‘정신적 내전 상태’라고 비유하며 “한강을 사이에 두고 진리가 다르다. 이런 격렬한 정치 갈등의 조건에서 그것을 넘어서는 공정한 사법적 결정이 가능할 수 있을지 실로 의문”이란 취지로 말했다.

그러면서 여러 원인을 거론했고 이 과정에서 ‘스스로 민주주의자로 여기는 민주주의의 적대자’ 예를 들었다. 가장 먼저 언급한 건 386(80년대 학번, 60년대 출생)들이다. 최 교수는 “(민주화를) 직접 만들어왔다는 사람들이 정치계급이 되어 한국 정치를 주도하게 될 때 이상하게 이런 상황이 왔다”며 “스스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정치를 만들어내는 주역이 됐다는 건 패러독스”라고 했다. 민주화 운동 세력의 ‘운동 중심의 민주주의관’을 지적하며 “민주화 제도를 변화시켜 나가는 건 많은 노력과 미시적 시도가 필요한 데 그런 건 관심 없고 ‘우리는 계속 전쟁’이라면서 과거와의 전쟁으로 투쟁하는 건 사회가 넓은 영역에서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강남 좌파’들에 대해선 불편하다고 했다. 최 교수는 “386 운동세대가 한 세대 지나면서 사회적 상층으로 부상했다는 건데 변화된 현실에서 사고해야 하는데 생각은 30년 전 사고로 냉장고에 넣었다 끄집어낸 것”이라며 “30년 전 이해했던 걸 30년 뒤에도 그대로 하려는 소리로 들린다”고 질타했다.

같은 달 5일 서초동 일대에서 열린 ‘조국 수호’ 집회. [뉴시스]

같은 달 5일 서초동 일대에서 열린 ‘조국 수호’ 집회. [뉴시스]

최 교수는 “패자에 참을 수 없는 비용을 청구하면 민주주의가 유지되기 어렵다”고 했다. 이 과정에선 촛불시위에 오기까지 한나라당 정부의 문제를 들었다. 강연 전 배포한 기고문엔 이명박(MB) 정부 때라고 적시했다. 그는 “MB 정부가 앞선 진보적 두 정부(김대중·노무현 정부)의 기본 정책들을 전면적으로 뒤엎는 정책을 폈을 뿐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간 검찰수사가 패자(敗者)의 존립 자체를 위협했다”고 했다. 그러자 “진보파들은 제도권 밖 시민사회를 조직·동원하는데 사활을 걸었고, 문성근의 100만 민란 운동 등 ‘좌파 포퓰리즘 운동’이 분출됐다. 이러한 흐름이 문재인 정부를 만드는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반면 긍정평가한 건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이다. 그는 “DJP 연합은 단순한 정치연합의 범위를 훨씬 벗어난다. 정치연합의 상대가 군부독재의 원조(김종필 전 국무총리)”라며 “DJ는 과거 갈등을 되풀이하는 게 더 큰 갈등을 불러들이는 것 말고 얻을 게 없다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꿰뚫어 봤다”고 했다. 대북정책, 한·일 간 화해,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중의 경제개혁 등을 예로 들며 “(DJP연합으로 인한) 넓은 정치적 기반의 역할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고 했다.

대선 캠프 중심의 정부 구성, 또 국정운영의 문제도 지적했다. 최 교수는 “386이 동질적 핵을 이루고 사회 명사, 이런 전직 관료들이 캠프를 이루면서 대선을 치르는 과정이 위험하다”고 했다. 정당이 역할을 못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과거처럼 개혁을 주장하지만, 그 결과는 ‘정부가 정당하다’는 것이다. 정부가 개혁의 기수가 되기 때문에 모든 걸 국가 권력을 통해 추진하면서 다원성을 허용하지 않는다”라며 “(그 결과) 관제 시민운동, 관제 개혁 등 관이 중심이 되는 현상을 만난다”고 했다. 강연 마지막에 최 교수는 386 운동권 정치인들을 겨냥해 “더 이상 진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DJP연합 정치권 갈등의 악순환 끊어 

시민단체도 비판했다. 최 교수는 “(2016년) 촛불집회 이후 전면적으로 정치화하며 변질됐다”며 “국가로부터의 자율성이 본질이지만, 국가권력에 의해 동원돼 국가의 지지 기반 창출에 보조적 역할을 하는 게 오늘날의 시민사회”라고 했다. 이 같은 지적에 토론자들은 “시민단체들이 정치화할 수밖에 없는 현실도 봐야 한다”(김선욱 청암재단 이사장), “정치화되고 갈라진 건 사실이지만 완전히 동원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임현진 서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등 반론도 나왔지만 최 교수는 비판 수위를 낮추지 않았다.

최 교수의 기고문엔 또 “자유주의적·헌법주의적 전통이 약한 대신 ‘인민민주주의’적 민주주의관이 강한 한국 민주화의 특성”도 포함됐다. 현재 진보세력 내에서 언급되는 ‘직접 민주주의’가 전체주의와 유사해질 수 있다고 최 교수는 경고했다. “다원적 통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가 누락되고 직접민주주의를 진정한 민주주의로 이해하고, 모든 인민을 다수 인민의 ‘총의’에 복종하도록 강제하는 틀은 전체주의와 동일한 정치체제”란 것이다.

한영익 기자 hany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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