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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판 '1987' 나올 수 있을까…사회문제 담아 흥행하는 한국영화 배우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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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1997년 홍콩 반환 이후의 불안감을 청춘들의 잇따른 죽음과 자살로 그린 영화 '메이드 인 홍콩'. 2년 전인 20주년 복원판이 올해 서독제에 초청돼 상영됐다.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1997년 홍콩 반환 이후의 불안감을 청춘들의 잇따른 죽음과 자살로 그린 영화 '메이드 인 홍콩'. 2년 전인 20주년 복원판이 올해 서독제에 초청돼 상영됐다.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4년 전 이 영화를 봤을 땐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날까, 했는데 지금 다시 보니 실제 하나하나 일어나고 있다. 중국 정부가 홍콩에 한 일들이 영화보다 더 공포스럽다.”

지난달 30일 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이하 서독제) 홍콩 독립영화 특별전 상영작 ‘10년’을 본 홍콩 관객이 한 말이다. 영화는 2015년, 홍콩의 젊은 감독 5인이 제각기 홍콩의 10년 후를 상상한 단편을 모은 옴니버스 작품. 이번 영화는 일본·태국 등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차례로 진행돼온 프로젝트다. 2014년 중국의 홍콩 선거 개입에 맞선 민주화 시위 ‘우산혁명’의 좌절 속에 홍콩인들이 느낀 불안감을 지역 문화와 자유가 억압된 근미래 풍경으로 그렸다.

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 홍콩 독립영화 특별전

"영화 속 미래, 예언처럼 맞아 떨어졌죠"

올해 서독제 홍콩 독립영화 특별전에서 상영된 옴니버스 영화 '10년'. 홍콩의 젊은 감독들이 2015년, 10년 후 홍콩의 미래상을 상상한 것으로 시위가 한창인 현실과 맞아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올해 서독제 홍콩 독립영화 특별전에서 상영된 옴니버스 영화 '10년'. 홍콩의 젊은 감독들이 2015년, 10년 후 홍콩의 미래상을 상상한 것으로 시위가 한창인 현실과 맞아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2025년 중국 표준어가 유일한 공용어가 되면서 홍콩 현지어인 광둥어를 쓰는 택시운전사들은 중국 중앙 정부에 통제받게 되고(단편 ‘방언’), 홍콩 지역색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홍콩에선 현지 농산물을 생산하고 파는 것조차 금지된다(‘현지계란’). 중국이 ‘하나의 국가, 두 개의 체제(일국양제)’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며 시위에 나선 홍콩 젊은이들은 폭력적으로 진압되고, 분신자살마저 벌어진다(‘분신자살자’). 5월의 축제날엔 홍콩 정치인을 겨냥한 암살 테러가 시도된다(단편 ‘엑스트라’).
이 영화는 현지 개봉 당시 상영관 한 곳으로 시작했지만 잇단 매진으로 상영규모가 커지며 전 사회적인 화제를 모았다. 올해 초부터 친중 정부에 맞선 시민들의 장기 시위가 격화된 홍콩의 현실과 닮은 장면도 적지 않다.

1일 서독제 홍콩 독립영화 특별전에선 홍콩 신구 독립영화인이 모어 특별대담을 가졌다. [사진 나원정]

1일 서독제 홍콩 독립영화 특별전에선 홍콩 신구 독립영화인이 모어 특별대담을 가졌다. [사진 나원정]

“제목을 ‘10년’이 아니라 올해(‘2019년’)로 해야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얘기도 들었다.” 이 영화로 내한한 프로듀서 앤드류 초이가 영화제 상영 후 들려준 얘기다.
그는 “영화를 기획하던 중에 우산혁명이 벌어졌고 절망했지만, 영화에 다음 세대에 대한 희망을 담으려 애썼다”면서 “찍을 땐 이렇게 큰 반응을 예상 못 했는데 영화가 마치 예언처럼 하나하나 맞아 떨어졌다”고 했다.

서독제 이례적 홍콩영화특별전  

올해 서독제 홍콩특별전에서 상영된 홍콩 독립영화 '천상인간'.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올해 서독제 홍콩특별전에서 상영된 홍콩 독립영화 '천상인간'.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이 영화만이 아니다. 올해 서독제에선 1997년 중국에 반환된 후 홍콩 사회 변화와 시대상을 담은 독립영화 10편이 특별전을 통해 소개됐다. 앤드류 초이 프로듀서를 비롯해, 독립영화 거장 프루트 챈 감독, 홍콩 뉴웨이브를 잇는 제시 창 취이샨 감독, 이번 상영 목록 선정에도 참여한 홍콩아시안영화제의 클라렌스 추이 집행위원장 등 신구 영화인이 내한해 특별대담도 가졌다.
97년 개봉한 프루트 챈 감독의 ‘메이드 인 홍콩’이 20주년을 맞아 2년 전 제작한 4K 디지털 복원판부터 올해 최신작 ‘프린스 에드워드역에서: 내 오랜 남자친구에게’까지 22년 세월에 걸친 이번 상영작 중 절반 이상이 한국에선 처음 상영된다. 해외초청 특별전에서 주로 신작을 소개해온 서독제의 이례적 발굴이다. 올해 해외 프로그램을 담당한 김영우 프로그래머는 “최근 홍콩의 상황과 홍콩인들의 정서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면 좋을 것”이란 취지를 밝혔다.

올해 서독제 홍콩영화특별전에서 상영된 영화 '프린스 에드워드역에서: 내 오랜 남자친구에게'.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올해 서독제 홍콩영화특별전에서 상영된 영화 '프린스 에드워드역에서: 내 오랜 남자친구에게'.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10년’과 함께 가장 주목받은 영화는 ‘메이드 인 홍콩’이다. 97년 당시 홍콩 반환이 초래할 불안과 긴장의 정서를 부모에 버림받은 스무 살 건달 차우를 둘러싼 젊은이들의 잇단 자살과 죽음으로 담아냈다. 한낮에 도심에서 투신자살한 여학생의 피 묻은 유서를 가져오고부터 차우는 악몽을 꾸기 시작한다. 이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폭력들은 평범한 일상처럼 거리에 만연해 있다. 그 모습이 유령처럼 표현되기도 한다.
“미래에 대한 소극적인 감정, 두려움을 죽음으로 표현했다. 나 역시 그때 절망적이고, 미래에 대해 자신감이 없었다.” 1일 본지와 만난 챈 감독의 말이다.

반환 당시 정치 관심없던 청년들 이젠

올해 서울독립영화제를 찾은 홍콩 독립영화 거장 프루트 챈 감독을 1일 압구정 CGV에서 만났다.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올해 서울독립영화제를 찾은 홍콩 독립영화 거장 프루트 챈 감독을 1일 압구정 CGV에서 만났다.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8만 달러, 한국돈 1억원이 안 되는 저예산 영화로, 배우를 빼면 다섯 명의 스태프가 사용기한이 지난 3가지 종류의 자투리 필름을 섞어 촬영했다. 배우 유덕화의 영화사 포커스필름스가 자금을 보태 화제가 됐다. 이듬해 ‘그해 불꽃놀이는 유난히 화려했다’, 다음 해 ‘리틀 청’까지 프루트 챈 감독의 홍콩 반환 3부작 출발점이었다.
챈 감독이 이렇게 영화를 만들어야 했던 이유가 뭘까. “저는 주류영화를 보고 자랐다. 그런데 영화계에서 97년 반환에 대해 관심 둬 주지 않고 그런 영화를 찍지 않기에 직접 찍기로 결심했다.” 그는 “가상의 예로 한국이 갑자기 북한에 반환돼야 한다, 했을 때 걱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무지한 사람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을 이었다. “반환까지 약 10년 정도 홍콩에선 중국 대륙에 가서 일하는 남자들이 많아지며 가정불화와 불륜이 늘어나며 사회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청년들은 가정의 변화에 불안감을 가졌지만 정치 문제엔 관심이 없었다. 부모세대만 정세에 불안감을 갖고 이민을 생각했다. 그런 문제들을 담으려 했다.”

올해 서독제에 초청된 홍콩영화 '대람호'. 반환 이후 변해버린 홍콩의 초상을 마주했다.[사진 서울독립영화제]

올해 서독제에 초청된 홍콩영화 '대람호'. 반환 이후 변해버린 홍콩의 초상을 마주했다.[사진 서울독립영화제]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에선 “개봉 당시엔 청년들이 이 영화를 무시했다. 자기들에게 설교하는 것처럼 느꼈다”면서 “그런데 20주년 재상영 때 보곤 이제야 이해가 간다며 공감했다”고 했다.
중국에서 태어나 열 살 무렵 부모와 함께 홍콩에 이민 가서 정착한 그는 이러한 정체성으로 인해 “(영화를 통해) 중국과 홍콩의 경계에 다리를 만드는 작업을 해왔다”면서 “어릴 적 중국과 홍콩의 냄새가 다르다고 느낀 경험을 영화 ‘두리안 두리안’(2000)에 담기도 했다”고 돌이켰다.

패륜범죄 실화부터 이민자 고독까지

올해 홍콩 초청작에선 동시대 홍콩을 향한 비판적인 시선, 씁쓸함이 감돌았다. 다큐로 알려진 청킹와이 감독의 극영화데뷔작 ‘쪽빛하늘’(2017)은 충격적인 범죄 실화가 토대. 근친 살해를 자백한 10대 소녀, 그리고 치매 아버지를 돌보며 이를 쫓는 임산부 형사를 교차하며 중국 반환 후 경제적 안정은 찾았지만 정신적 외상과 자유에 대한 갈망에 시달리는 홍콩의 현실을 그려냈다. 제시 창 츄이샨 감독의 ‘대람호’(2011)는 배우인 주인공이 꿈을 쫓아 영국에 갔다가 실패하고 홍콩에 돌아오지만 아버지는 사라지고 어머니는 치매 증세로 딸을 못 알아보는 등 낯설게 변한 고향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떠올리는 이야기.

홍콩 충격 범죄 실화를 토대로 한 '쪽빛하늘'.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홍콩 충격 범죄 실화를 토대로 한 '쪽빛하늘'.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거장 감독 지아장커와 허안화의 촬영감독으로 이름난 유릭와이 감독의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 ‘천상인간’(1999)은 중국 본토에서 홍콩에 이주해 정착하려는 이민자들의 고독감을 교통사고로 아들과 한쪽 다리를 잃은 엘리베이터걸, 유행에 뒤떨어진 건달, 사창가를 드나드는 엘리베이터 수리공 등의 인물군상에 새겼다. 얀 얀 막 감독의 ‘나비’(2004)는 동성애와 천안문사태라는, 중화권 영화의 두 금기를 여성 교사의 자아 찾기 여정에 담았다.

"홍콩서 '1987' 같은 영화 나올 수 있을까"

전성기를 누리던 1990년대 초반만 해도 한 해 300편씩 제작되던 홍콩영화는 21세기로 오며 5분의 1 규모로 뚝 떨어졌다. 2003년 경제협력동반자협정(CEPA)에 따라 홍콩과 중국 본토 제작사가 중국어로 만든 합작영화가 늘어났지만, 이는 새로운 고민을 안겼다.

올해 서독제에서 상영된 영화 '나비'. 동성애, 천안문사태 등 중화권 영화의 두 금기를 정면으로 담았다.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올해 서독제에서 상영된 영화 '나비'. 동성애, 천안문사태 등 중화권 영화의 두 금기를 정면으로 담았다.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합작영화를 찍게 되면 중국의 검열 기준에 맞아야 영화를 상영할 수 있다. 특히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영화에 엄격하다. 최근엔 배우의 개인 생활, 품격에 대한 제약도 많다.” 1일 특별대담 ‘반환 이후의 이미지들: 1997년 이후의 홍콩독립영화’에서 클라렌스 추이 홍콩아시안영화제 집행위원장의 말이다. ‘10년’의 앤드류 초이 프로듀서는 “이런 정치적 소재의 영화를 (홍콩에서) 계속 찍을 수 있을까. 현재 홍콩 시위 상황도 많은 이들이 다큐멘터리로 찍고 기록하고 있지만 (민주화운동을 담은) 한국의 ‘1987’처럼, 그런 영화가 홍콩에서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어두운 심경을 털어놨다.

"사회파 영화로 흥행하는 한국영화 배우고 싶다"

홍콩 젊은 감독들이 2015년, 10년 후 홍콩을 그린 옴니버스 영화 '10년' 속 단편 '현지계란'에선 어린 아이들이 소년군으로 징집돼 불온 서적, 상품 등을 단속하는 미래를 그렸다.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홍콩 젊은 감독들이 2015년, 10년 후 홍콩을 그린 옴니버스 영화 '10년' 속 단편 '현지계란'에선 어린 아이들이 소년군으로 징집돼 불온 서적, 상품 등을 단속하는 미래를 그렸다. [사진 서울독립영화제

프루트 챈 감독은 1일 대담 직전까지 휴대폰을 통해 홍콩 침사추이에서 열린 실시간 시위 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날 침사추이에선 지난달 8일 시위 중 추락해 사망한 홍콩과기대 차우츠록 학생을 기리는 집회에 주최 측 추산 38만명의 군중이 모여, 결국 경찰과 시위대의 무력 충돌로 번졌다. “‘메이드 인 홍콩’을 촬영을 마치고 필름이 남아 그날 새벽 인민해방군이 홍콩에 들어오는 것을 찍었고 그 장면을 ‘그해 불꽃놀이는 유난히 화려했다’에 넣었다. 찍을 당시엔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역시 역사는 항상 변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챈 감독의 말이다. “이창동 감독을 존경하고 한국영화 ‘올드보이’ ‘기생충’을 재밌게 봤다”는 그는 “사회적인 문제를 영화에 담아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하는 한국영화들에 배울 점이 많다”고 말했다. 제45회 서독제는 오는 6일 폐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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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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