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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일자리 대기 30번이지만···노인들 "청년들도 도와주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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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3일 오전 경기 안양시의 노인복지관 일자리 창구는 쉴새없이 붐볐다. 한 노인이 내년도 일자리 안내 공지를 보고 있다. 정종훈 기자

3일 오전 경기 안양시의 노인복지관 일자리 창구는 쉴새없이 붐볐다. 한 노인이 내년도 일자리 안내 공지를 보고 있다. 정종훈 기자

"일자리 처음 신청하시나요? 어떤 거 신청하실지 정하셨어요?"

3일 오전 경기 안양시 노인종합복지관 1층 사무실. 노인 10여명이 '일자리팀' 창구 앞에 몰려 있다. 대기 번호표를 뽑거나 신청서를 쓰려는 사람들이다. 새하얀 첫눈이 내렸지만, 옷에 내려앉은 눈을 털면서 들어오는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80대 "난 생계형, 월 27만원 적어 3장만 더 줬으면" #70대 "혼자 살아, 치매 예방 위해 밖에 나와 일해"

이날은 정부가 내년도 노인 일자리 참여자를 모집한 지 이틀째였다. 만 60세 또는 65세 이상 노인이 대상자다. 2~13일 가까운 노인복지관, 읍면동 주민센터 등을 방문ㆍ신청해야 된다. 이 복지관에서 신청한 노인들은 모두 기초연금 수령자다. 환경 미화ㆍ어린이 하교 지원 등 공익활동(공공형) 일자리에 참여해 월 27만원을 받는다.

3일 오전 경기 안양시의 노인복지관에서 일자리 신청 차례를 기다리며 앉아있는 노인들. 정종훈 기자

3일 오전 경기 안양시의 노인복지관에서 일자리 신청 차례를 기다리며 앉아있는 노인들. 정종훈 기자

‘28’. 시계가 오전 11시를 조금 넘겼을 때 일자리 창구 알림창에 뜬 대기번호다. 한 80대 노인이 "어제는 이 시간에 30~40번 떴는데 오늘은 그나마 덜 왔네"라고 했다. 창구가 빌 새 없이 한 명이 떠나면 다음 사람이 바로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대부분 70~80대 고령자였다. 삼삼오오 모여 "무슨 일자리 신청하시냐" "일찍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사람 많네"라며 담소를 나눴다.

노인의 상당수는 팍팍한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집 바깥으로 나섰다고 했다. 지난달까지 길거리 담배 꽁초 줍기에 참여했다는 백석봉(80)씨는 손가락 3개를 펴보였다. "더도 말고 딱 3장만 더 줬으면 좋겠다." 30만원이냐고 묻자 "3만원"이라고 웃었다. "월 27만원은 너무 적다. 잘 사는 사람은 용돈이겠지만 우리는 생계형이라서 3만원은 더 올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년 노인일자리가 10만개 는다는 걸 알려주자 "선거 때문이냐"고 반문했다.

그는 "2014년부터 노인 일자리 참여했는데 도서관 보조, 학교 환경 미화, 아동안전지킴이 등 다양하게 해봤다. 그나마 집사람도 27만원짜리 초등학교 급식 보조를 하니 둘이 번 돈을 모으면 도움이 된다"면서 "아직 지팡이도 안 짚는다. 앞으로도 힘 닫는 한 계속 신청할 생각이다"고 했다.

내년도 일자리 신청을 마친 사람이 받은 팸플릿을 보여주는 모습. 참여하길 원하는 업무를 1~2순위로 신청했다고 한다. 정종훈 기자

내년도 일자리 신청을 마친 사람이 받은 팸플릿을 보여주는 모습. 참여하길 원하는 업무를 1~2순위로 신청했다고 한다. 정종훈 기자

올해 환경 미화에 참여했던 이귀선(80)씨도 내년도 일자리 신청을 일찌감치 마쳤다. 10년 전쯤 노인일자리에 참여했지만 허리를 다친 후 쉬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초연금만으로 생계를 꾸리기 어려워 지난해 말 생각을 바꿨다. "형편 나아지면 일자리 신청 안 할텐데 돈이 모자라니 일을 해야 한다"면서 "27만원도 좋은데 30만원으로만 채워 달라고 정부에 이야기 좀 해달라"고 했다.

금전 문제뿐 아니라 건강을 위해서 또는 외부 활동을 하려고 신청한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2015년부터 초등학생 하교 도우미를 했다는 김모(73)씨는 기초연금과 노인일자리, 국민연금 등을 합쳐 70만원 안팎을 번다고 했다. 돈도 돈이지만 혼자 살기 때문에 사회 활동을 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그는 "주변 친구들도 다 재밌다고 일자리에 참여한다. 사실 일자리 줘도 살고, 안 줘도 살지만 집에만 있으면 금방 치매가 올 거다"면서 "10년 전 남편과 갑자기 사별한 뒤 사람들이랑 어울리지 못 했는데 일을 나가면서 지금은 너무 밝아졌다"고 말했다. 백씨도 "밖에서 몸을 쓰니까 우울증이나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되는 거 같다. 집에 있으면 할 게 없다"고 했다.

내년도 노인일자리 모집 포스터. [자료 보건복지부]

내년도 노인일자리 모집 포스터. [자료 보건복지부]

반면 노인일자리가 그리 절실하지 않은 곳도 있다. 이날 오후 서울 강남구에 있는 노인종합복지관은 노인일자리를 접수하러 온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신청 안내문만 복지관 곳곳에 붙어있을 뿐 신청을 받는 사무실 앞은 조용했다. 서초구의 노인종합복지관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소득 수준이 높은만큼 노인일자리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은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민주당 김상희 의원이 10월 공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강남 3구의 공익활동 노인일자리 참여자는 목표치를 채우지 못 했다. 송파구는 계획한 일자리의 56%만 집행됐고 강남구는 72%, 서초구도 85%였다. 박모(71)씨는 "소일거리 삼아서 노인일자리를 신청하려고 한다. 다만 요즘 뉴스를 보다보면 '늙은이처럼 젊은이도 도와줘야 할텐데'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노인일자리만큼 청년 취업도 정부에서 신경 썼으면 하는 바람이 담겼다.

내년도 일자리를 신청하러 온 노인들은 번호표 순서를 기다리면서 신문을 보거나 담소를 나눴다. 정종훈 기자

내년도 일자리를 신청하러 온 노인들은 번호표 순서를 기다리면서 신문을 보거나 담소를 나눴다. 정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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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전화가 안 오면 선발되지 않은 거예요 어르신."

안양 노인복지관 직원들은 이런 설명을 반복했다. 일자리를 신청한 노인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말은 ‘탈락’이다. 일자리 참여자 선정은 소득 수준, 경력 등의 기준에 따라 고득점자 순으로 이뤄진다. 내년도 노인일자리 모집 결과는 이달말에서 다음달 초 사이에 개별 통보된다. 연락이 오지 않는 사람은 집에서 쉬어야 한다는 의미다. 한 70대 노인은 "매년 신청할 때마다 불안하다. 아무래도 일자리를 더 늘려주면 덜 불안할 거 같다"고 했다. 이귀선씨는 "오늘 신청한 거 잘 되겠지? 내년에도 꼭 해야 하는데…"라며 복지관 문을 나섰다.

정종훈 기자 sake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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