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한은화의 생활건축

시공 오차가 만든 ‘잘라 쓰는 욕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0면

한은화 기자 중앙일보 기자
한은화 건설부동산팀 기자

한은화 건설부동산팀 기자

건축은 작은 것들의 집합체다. “완성되는 순간까지 작은 요소들이 모여 전체를 만들어가는 작업”(조성룡 건축가)이다. 작은 것들의 생태계를 보면 한 나라의 건축 수준을 알 수 있다. 창호·타일·벽돌 등 건축자재가 발달했는지, 자재 시공 능력은 어떤지 등이 건축 수준의 ‘바로미터’가 된다.

그 작은 것 중에 하나, 아파트 욕조 사이즈에도 남다른 이유가 있다. 아파트 욕실에 흔히 설치하는 직사각형 매립형 욕조의 길이는 1500~1600㎜다. 실제 물 받는 탕의 길이는 작다. 약 1300㎜다. 욕조의 머리 대는 부분(데크)이 유독 길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탕을 더 길게 하는 게 좋으련만 왜 그런 걸까.

잘라 쓰는 욕조 대신 반신욕 욕조와 키 큰 장을 넣은 욕실. [사진 새턴바스]

잘라 쓰는 욕조 대신 반신욕 욕조와 키 큰 장을 넣은 욕실. [사진 새턴바스]

시공 오차 탓이다. 욕조의 긴 데크는 잘라 쓰기 위한 용도다. 평균적으로 아파트 욕실의 폭은 세로 1500~1600㎜, 가로 2100~2400㎜다. 세로 폭에 맞춰 욕조가 벽면에 딱 붙게 시공된다. 그런데 같은 평형의 아파트라도 집마다 욕실 사이즈가 다른 게 현실이다. 콘크리트 타설 등 현장 공사 여건에 따라 최대 70㎜가량 차이가 난단다. 이 탓에 시공업체는 현장에서 일일이 욕실 사이즈를 재서 그에 따라 욕조 머리 부분을 잘라 붙여넣는다. 기성제품을 쓰면서 현장에서 맞춤 제작하는 꼴이다. 하자 대응은 더딜 수밖에 없다. 방문해서 실측한 뒤 그것에 맞게 또다시 잘라 넣어야 한다.

욕조뿐 아니다. 요즘 아파트 욕실에 많이 설치하는 슬라이딩 장도 집마다 크기가 다르다. 기성제품의 가로 길이는 1200㎜다. 하지만 시공 오차로 공간 크기가 다르니 이 역시 일일이 재서 짜 넣는다. 욕실 자재 제조업체 새턴바스의 정인환 대표는 “처음 아파트 짓기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욕실 시공은 나아진 게 하나도 없다”고 개탄했다. 규격화부터 해야 하자 대응도 빠르고, 공간의 질도 연구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더 나은 삶터를 위해 바꿔 나가야 할 작은 것들이 참 많다.

한은화 건설부동산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