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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국 칼럼

뒤를 돌아보는 것은 앞으로 가기 위해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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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김진국 중앙일보 대기자 칼럼니스트

김진국 중앙일보 대기자 칼럼니스트

가끔 남대문 시장을 걷는다. 삶의 의욕이 넘치기 때문이다. 필요한 물건을 살 때도 있다. 그러나 흥정하는 일은 힘들다. 받을 가격을 부르고, 살건지 말건지만 결정하는 게 훨씬 편하다. 그렇지만 흥정이 시장의 재미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퍼펙트 승리’ 일본 발언은 옹졸 #진정한 승리는 함께 이익 얻는 것 #한·일 과거 문제 통큰 해결 기대 #문재인 정부이기에 가능한 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인에게 ‘서생(書生)적 문제 의식과 상인(商人)적 현실감각’이 모두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 혼자 산다면 ‘딸깍발이’로 사는 게 자랑스럽다. 그렇지만 나랏일을 하면서 ‘남산골 샌님’ 행세를 하면 국민이 고달프게 된다.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나섰으면 귀찮고, 힘들어도 배불리 먹일 방법을 모색해야 옳다.

조선 현종 시기에 예송논쟁이 벌어졌다. 대비가 상복을 1년 입을 것인가, 3년 입을 것인가로 다퉜다. 왕이 누구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서인 세상이 됐다, 남인 세상이 됐다 했다. 대비가 상복을 1년 입든, 3년 입든 백성들이 사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나. 중국의 주자가 분명히 적어놓은 것도 아니고,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를 놓고 그 난리를 피워야 했을까. 그 시간에 백성의 배를 불릴 궁리를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그것이 단순한 복식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 안에는 임금의 적서(嫡庶)와 정통성 문제가 깔려 있고, 군신(君臣) 관계와 정파의 흥망이 걸려 있었다. 예법은 핑계고, 뒤로는 정파 간의 권력투쟁이 담겨 있었던 셈이다. 1년이냐 3년이냐에 우리 가족, 우리 파당이 죽느냐, 상대가 죽느냐, 생사가 걸린 싸움이었다. 그러니 양보할 수도 없고, 타협할 수도 없었다. 우리 편의 잘못은 무조건 비호하고, 덮어야 했다.

최근 우리 정치가 꼭 그 꼴이다. 되지도 않은 일을 죽기 살기로 싸운다. 외교고, 국내정치고, 아슬아슬하게 벼랑끝을 걷고 있다. 힘없고, 살기 곤궁한 북한에서나 펼치던 ‘벼랑끝 전술’을 왜 우리가 따라하게 되었을까. 70년 간 쌓아온 국제 관계를 왜 한순간에 엎치락뒤치락할까.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따지고 보면 지소미아 연장 거부는 일본의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때문이다. 일본의 전략물자 수출 규제는 또, 일제 시대 한국인 징용 피해자 배상 재판과 한국에 있는 일본 기업 자산 압류에서 비롯됐다. 더 올라가면 박근혜 정부에서 한·일 정부 간에 합의한 ‘화해치유재단’ 해체가 걸려 있다.

국내적으로는 지난 정부에 ‘친일 정권’의 낙인을 찍고, 다음 선거를 ‘친일 대 반일’ 구도로 끌고 가려는 정치적 의도가 다분해 보인다.  외교는 초당적으로 해야 한다고 한다. 집권세력부터 외교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아야 가능한 일이다. 이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지난 정부가 합의한 것을 뒤집어 버렸다. 징용 문제도 법원이야 법대로 판결했다 하더라도, 정부까지 그 처리를 이렇게 밀어붙일 일이었는지는 의문이다. 결국은 다른 길을 모색하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이 정부가 그렇게 비난한 ‘화해치유재단’보다 못한 해법이다. 잘못된 합의라는 이유로 지적한 일본 정부의 사과는 이번에도 없다. 오히려 조롱하고 있다. 화해치유재단에는 일본 정부가 기금을 내놓았지만, 이번에는 그런 말조차 꺼내지 못했다. 지금 같은 상황이 올까 봐 걱정을 주고받은 이전 정부와 대법원장은 ‘사법농단’의 주범이 돼 있다.

“지소미아 카드를 쓰지 않았다면 일본의 수출 규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얻은 것을 아무리 꼽아보아도 전통 우방과의 신뢰 상실로 잃은 손실이 훨씬 더 뼈아프다.

정치는 재판이 아니다. 두부 자르듯 선악으로 가를 수 있는 게 아니다. 볼셰비키냐, 멘셰비키냐는 선악의 포장을 입힌 권력투쟁일뿐이다. 우리가 지향하고 만들어온 의회민주주의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상생하는 정치다. 법률가인 대통령은 대화를 거부하고, 법률가인 제1야당 대표는 단식 투쟁을 벌이는 것은 정치가 아니다.

그런데 자존심 대결을 벌여온 한·일 갈등을 이제라도 풀기로 한 것은 대단한 결단이다. 누가 더 얻고 더 잃었는지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아무리 덜 얻었어도 양국에 모두에 이익이다. 양국 갈등은 두 나라 모두에게 자해행위이기 때문이다. 대국적인 양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큰 정치인이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퍼펙트 승리’라는 일본 고위관료의 발언이나, “우리는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았다”는 아베 일본 총리의 말은 너무 옹졸하다. 진정한 승리는 뺏는 게 아니라 함께 이익을 얻는 것이다. 일본이 존경받는 나라가 되는 길은 군사력이 아니라 이웃나라를 배려하는 자세에 있다. 일본을 지도적 위치까지 이끌어온 정치 선배들의 처신을 더 배워야 한다.

과거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래를 위한 것이다. 이 기회에 다시는 과거 문제가 미래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통큰 해결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피해자들과 함께 해온 문재인 정부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김진국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