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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미·중 경쟁시대에 적응 못하는 한국 외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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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황준국 한림대 객원교수 전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황준국 한림대 객원교수 전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정부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를 막판에 유예했다. 한·미 관계 악화를 막고 사태 수습의 첫 단추를 끼워 다행이지만, 한국 외교의 미숙함을 또 드러내 뒷맛이 쓰다. 지난 3개월간 정부는 “일본이 안보 문제를 거론하며 무역제재 조치를 취했으므로 우리도 지소미아를 종료시켰다”는 입장으로 일관했다. 국내적으로는 다소 설득력이 있었지만, 애당초 한국이 처한 외교·안보 환경의 큰 그림을 놓친 실책이었다.

지소미아 둘러싼 3개월 논란 교훈 #외교가 우습게 보이면 안보 위태

국내 정책은 어려운 문제라도 정부의 국정 철학과 논리가 세워지면 일단 밀고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외교·안보 문제는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일수록 정부의 철학이나 논리를 세우기 이전에 국제 정세, 특히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와 역학관계(Dynamics)를 정확히 읽고 분석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외국은 한국의 법과 제도 밖에 있으며 우리가 선거로 바꿀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게다가 한반도 주변에는 세계에서 제일 강한 나라들과 세상에서 제일 말 안 듣는 북한만 있다. 20세기 미·소 대결이 시작될 때 지정학은 한국을 국토 분단과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었다. 21세기 미·중 대결 시대에 지정학은 다시금 우리를 최전방에 세우고 있다. 2016년 중국은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의 한반도 배치가 중국의 대미 핵 억지력을 훼손하는 조치라며 반발했다. 한국 정부는 북한 핵미사일에 대응하는 조치라고 주장했지만, 중국은 미국 생각뿐이었다. 사드 배치 결정 이후 중국은 한국에 제재를 가했고 지금도 지속하고 있다.

미국은 중국을 “전략적·경제적 라이벌”이라고 규정짓고 미·중 관계를 완전히 바꿨다.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은 지난해와 올해 두 번에 걸쳐 미·중 관계에 관한 정책 연설을 했다. 그는 지난 20년간 미국이 중국의 불공정 무역 행위, 지적 재산권 절취 등을 방치해 결과적으로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이 10배나 커진 것을 깊이 후회하면서 전임자들의 실책을 원망했다. 중국 견제를 위해 한·미·일 안보 협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미국 입장에서 문재인 정부의 지소미아 종료 카드는 전략적 타격이었다. 2002년 효순·미선 양 사망 사건이나 2008년 광우병 논란 사태와 달리 정부가 차분히 결정한 사안이었기에 미국은 더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외교·안보에서 현실 파악이 현실과 동떨어지면 좋은 구상도 신념도 국내용일 뿐이다. 북핵 문제, 지소미아 등 중요한 안보문제에 있어서 우리의 외교 공간은 제한적이다. 그 제한된 공간의 모양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현명하게 판단해야 한다.

한국의 외교·안보는 운명적으로 미·중 두 강대국의 경쟁·갈등·협력·대결이라는 맥락 속에서 고민하고 검토하고 결정해야 한다. 20세기 미·소 대결 때보다 상황이 훨씬 복잡하다. 중국은 과거의 소련보다 경제적으로 강하고, 세계화돼 있어 대부분 나라는 중국과의 무역량이 미국보다도 많다. 그래서 미국은 장기적으로 고난도의 중국 대응전략을 구사할 것이고 복잡하게 진화해 갈 것이다. 6·25전쟁에서 미군 5만명이 전사한 미국에 한국은 특별한 동맹이다. 동시에 한국은 역사·지리·경제·문화면에서 중국에 특별한 나라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미·중 모두 한반도를 떠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은 미·중 경쟁의 한복판에 서 있다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으면 안 된다. 한국이 국내적으로 쉽게 정당화되는 입장에만 의지해 중요한 외교·안보 문제를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자칫 적으로부터도 동맹으로부터도 우습게 보이게 된다. 한국 같은 지정학적 여건에서는 외교가 우습게 보이면 안보가 위태로워진다.

황준국 한림대 객원교수·전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