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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의 화신」 망명 지에 묻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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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27일 사망한 마르코스 전 필리핀 대통령의 일생은 영예로 시작해서 오욕으로 끝난 독재자의 전형적인 표본이었다.
그의 일생은 「필리핀을 구한 위대한 지도자」 에서 코라손 아키노 대통령의 말처럼 「필리핀 최대의 수치」로 마감됐다.
1917년 루손 섬 북부 일리코스 노르테에서 태어난 그는 필리핀 명문 마닐라 대 수석졸업과 변호사시험 사상 최고점수의 수석을 기록한 엘리트로 젊은 시절을 시작했다.
21세 때 아버지의 정적 암살사건에 연루돼 범인으로 재판을 받았으나 무혐의로 풀려났으며 감옥에서 공부,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2차 대전 때는 항일전쟁에 참전, 많은 훈장을 받아 국가적 영웅이 됐었으며 28세의 나이로 의회에 진출, 정치에 입문했다.
65년의 대통령선거에서 마카파갈 당시 대통령을 누르고 당선, 86년 망명 때까지 21년간 필리핀의 절대 군주적 대통령이 됐다. 69년 재선에 성공한 그는 72년 임기만료를 앞두고 학생시위에 봉착, 「신의 인도」를 이유로 계엄령을 선포함으로써 독재자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계엄령 초기 6만여 명의 반대세력을 투옥하는 무자비한 정치탄압을 계속하면서 사치와 족벌정치를 통한 부패의 중심이 됐다.
그는 81년 계엄령을 해제, 3선 대통령이 됐으나8 6년 4선 시도에서 이른바 「민중혁명」 에 의해 무너졌다.
21년에 걸친 그의 집권기간 중 초기에는 의욕적이고 뛰어난 정치인으로 숭앙됐었다. 신 사회건설을 내세운 그의 정치지도력은 당시 필리핀에서는 「구국의 표상」 이었다. 그러나 그의 권력에 대한 집착은 부인 이멜다의 후계자 옹립시도와 83년 귀국 길의 정적 베니그노 아키노 전 상원의원의 암살로 이어졌다.
아키노 전 상원의원의 암살은 마르코스 몰락의 신호가 됐으며 그는 결국 아키노의 부인 코라손 아키노 현대통령에 의해 쫓겨나는 신세가 됐다.
마르코스의 부패는 부인 이멜다의 사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이멜다는 5천6백만 국민이 빈곤 속에 허덕이고있는 가운데 미 뉴욕에 1억 달러 짜리의 아파트· 그림 등 부동산을 구입하는가하면 로마·파리 등 유럽 3곳에 별장을 마련하기도 했다.
필리핀정부는 마르코스가 재임기간 중 빼돌린 재산은 최고 1백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하고있다.
지난86년 2월4일 하와이에 도착한 마르코스는 호화별장을 구입, 은둔생활을 하면서 지병인 신장병을 치료해 왔다.
그는 수 차례 반정부군을 동원, 필리핀에 상륙, 쿠데타를 모색하다가 실패, 최근까지 좌절 속에 지내왔다.
그가 죽기는 했지만 그의 은닉재산 처리와 재판 등 아직도 미결된 것이 많아 당분간은 계속 세인의 관심을 모을 것으로 보인다. <이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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