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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만한 물건은 거의가 수입품-「개혁」을 기다리는 소 경제의 실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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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소련을 방문하는 서방측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나라 소련의 경제는 한마디로 「부족의 경제」라는 사실이다. 모스크바시의 번화가인 고리키가 상점들은 무언가 사겠다는 사람들로 언제나 장사진을 이룬다. 육류·채소·빵·우유제품 등 식품점 마다엔 물건이 바닥나기 전에 하나라도 더 구입하려는 욕구들로 뜨겁다.
아이스크림 가게 앞엔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기 위해 긴 줄을 서서 1∼2시간씩 기다리기 예사다.
최근 특히 두드러진 것은 비누 부족문제. 세수 비누에서 세탁용 비누까지 모든 비누가 부족하지만 세탁비누가 특히 부족해 집집마다 비누가 없어 세탁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아우성이다.
비누의 품귀는 모스크바시내 외국인 전용 1급 호텔에서도 마찬가지. 투숙 첫날 객실에 손가락 두개정도 크기의 조그마한 비누가 한번 놓이면 며칠이 지나도 그대로다.
지난 7월 소련의 전 산업을 일시 마비시켰던 시베리아·우크라이나 지역 대규모 탄광파업사태의 주요 발생원인가운데 하나도 현행 광부 1인당 월 1·5초의 비누지급 규정을 개정, 비누공급을 더 늘려 달라는 것이었다.
설탕부족 또한 심각하다. 원래 단것을 좋아하는 소련국민들인데다 고르바초프 집권 후 대대적인 절주 정책을 실시, 알콜 생산량을 대폭 줄이자 이에 맞서 설탕을 사용한 밀주조가 성행하면서 설탕 소비가 크게 늘고 있는 것이 주요원인이다. 최근 수년간 소련의 설탕소비는 계속 연 10%이상의 높은 증가추세에 있다.
누적된 재정적자로 인플레이션이 유발돼 루블화 가치가 떨어지고 있는 것도 가뜩이나 부족한 물자 난을 부채질하는 큰 이유 가운데 하나다. 불안을 느낀 소비자들의 환물 심리가 발동, 물건이라 하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사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역적으로 모스크바등 대도시에서 지방으로 갈수록 생필품 부족사태는 더욱 심각하다.

<생필품 사재기 극성>
이 같은 식품·소비재 부족현상은 마치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여서 소련국민들의 불만이 한꺼번에 폭발할 경우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 자체를 날려 버릴 가능성조차 충분히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관점에 따라선 소련이 직면해 있는 「부족」은 상품의 절대량 부족만은 아니라고도 볼 수 있다. 한마디로 물건은 많지만 쓸만한 물건이 없다는 것이다.
한 예로 통계에 따르면 현재 소련은 연간 8억 켤레 이상 구두를 생산하는 것으로 돼 있다. 이를 2억8천만 소련 전체인구로 나누면 1인당 연간 3켤레로 미국보다 많다.
그런데도 소련의 구둣방엔 구두가 없다. 정확히 말해 신을만한 구두가 없다. 창고엔 아무도 신지 않을 구두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다.
소비를 무시한 생산, 중앙당국의 지시에 따라 전체 생산 숫자만을 맞추는 총량경제가 낳은 웃지 못할 결과들이다.
최근들어서야 소련당국은 상품의 질과 서비스, 즉 소비자의 수요를 고려한 생산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모스크바 붉은 광장 한쪽 크렘린 맞은편에 위치한 명물인 국영백화점 굼에서도 이러한 조짐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굼 백화점 총 지배인 스타니슬라브 소로킨씨는 지금까지 소비자를 무시한 판매를 해왔으나 지난해 소련 최초로 소비자단체가 결성되고 나서 소비자들로부터 새로운 제품, 높은 품질에 대한 강력한. 요구를 받고 있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1892년 처음 문을 열어 1백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굼 백화점은 소련 최대의 백화점으로 총면적 5만평방m(약1만5천평)에 매장면적만 2만평방m의 대형백화점이다.

<외국코너도 마련>
약 5만종의 물건을 취급하며 모스크바 시내 22개 지점을 합쳐 전체직원 1만3천명, 연간 약 7억 루블(미화 11억 달러)매출에 약1억 루블의 수익을 올리는 굼 백화점은 모스크바 전체 상거래의 약20%를 차지하고 있다.
소로킨 총 지배인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굼의 경영방침에 큰 변화가 옴으로써 종전의 「그저 말고 사는」단순경영에서 탈피, 최근들어 고객에 대한서비스 개선은 물론 해외 거래선 개척에도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굼은 최근 미국의 한 백화점과 합작투자를 진행중이며 핀란드의 유명 백화점인 갈린카와 합작, 이미 굼 백화점 안에 매장을 열어놓고 있다.
또 최근들어 소련경제에서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는 코페라치아(협동조합)와의 관계를 강화, 이미 2개의 코페라치아 상점이 굼에 매장을 열어 이들의 월매출액이 5백만∼7백만 루블로 굼 전체매상의 10%에 육박하고 있다.
이들 코페라치아는 주변 상점보다 훨씬 질이 좋은 식품·구두·직물·모피 등을 1·5∼2배 비싼 가격에 팔고있으나 품질이 좋기 때문에 인기가 있다. 다만 정부에서 제공한 원료를 가지고 가공 과정의 기술만으로 지나친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일반의 불만이 널리 퍼져 있는게 문제다.
굼이 당면한 문제는 역시 물자부족과 낮은 품질의 문제. 실제로 굼 백화점 내부를 돌아다녀 보면 상품의 질이 서방 세계에 크게 뒤짐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게다가 디자인이 유치한 물건들이 많다. 그나마 괜찮은 물건들은 동독·헝가리·폴란드 등 사회주의 권으로부터의 수입품이다.
특히 최근 소련인들 사이에서 수요가 큰 전자제품의 경우 전혀 수요를 채우지 못하고 있다. 이는 전자산업이 크게 뒤진 소련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나마 디자인이 뒤떨어진 크고 투박한 물건들이 대부분이다.

<한국제품도 인기>
소로킨씨는 지난 7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한국상품 전시회에 출품된 한국상품 중 특히 전자제품에 대해 소련인들이 아주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어 앞으로 한국회사들과 무역관계를 맺고 싶다는 의사를 강하게 표시했다.
최근 소련에선 또 한국제 컴퓨터에 대한 인기가 아주 높다. 얼마 전 모스크바의 한 공장에 설치한 컴퓨터를 밤중에 도둑이 들어 훔쳐갔다는 기사가 프라우다지에 크게 보도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특이한 존재인 외화 전용상점 베료스카(자작나무라는 뜻)가 있다. 소련정부가 외국인들을 상대로 외국 경화획득을 위해 설치, 운영하는 베료스카엔 소련사회에서 흔히 구할 수 없는 물건들이 고루 갖춰져 있다.
모스크바의 호텔 로시야 지하 베료스카엔 일제 카셋·TV수상기·VTR에서 소련인들도 먹기 어려운 캐비아(상어 알젓)·고급모피 등이 산같이 쌓여 있다.
그런데 일반 소련인들은 베료스카에 출입할 수 없도록 돼 있으나 실제는 외화만 있으면 얼마든지 이용이 가능하다. 따라서 소련인들은 누구나 외화를 갖기 원한다.
현재 공식환율은 미화 1달러가 소련 돈으로 0·64루블로 돼있으나 암거래는 달러 당 3∼5루블, 심하면 10루블까지 가기도 한다. 그러나 당국은 그 내용을 빤히 알면서도 외화수입을 위해, 또 그렇게 해서라도 어느 정도 물자부족을 해소(?)하는 효과를 기할 수 있기 때문에 눈감아주고 있다.
특히 최근 젊은층에선 서방국가들의 록음악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 카셋 녹음기·카셋 테이프는 젊은이들이 가장 갖고 싶어하는 물건들이다. 록음악이 수록된 카셋 테이프 하나에 20루블(한화 약 2만1천원). 소련인 평균 월급 2백 루블의 10분의 1이나 되는 거액(?)이다.

<쌓이는 재정적자>
소련사회에도 절대 빈곤층이 있다. 통계에 따르면 2억8천만 소련인구 중 20%가 넘는 약6천만 명이 한 달에 50∼60루블 내외의 수입을 가지고 살고 있다. 이들은 주로 연금생활자·노인·독신자 등으로 이들은 극도의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현재 소련에서 보트카 1병 가격이 10루블, 우유 1ℓ에 36코페이카(1루블=1백 코페이카) 임을 고려할 때 이들의 용수란 고작 보트카 5∼6병, 우유 1백30∼1백60ℓ를 살수 있는 금액이다.
고르바초프가 경제개혁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시급한 가격체제 개혁을 섣불리 손댈 수 없는 큰 이유 중 하나도 가격체제를 개혁했을 때 바로 이들이 입을 손해가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소련정부는 특히 식품가격의 경우 약 절반을 정부가 부담, 생산가격의 절반수준으로 국민에게 공급하고 있는데 이로 인한 재정 적자가 해마다 누적, 드디어 감당하기 어려운 사태에 이르고 있다.
소련의 저명한 개혁파 경제학자 아벨 아간베갼은 지난 3월 소련의 재정 적자가 금년에 미화 1천6백억 달러 선을 넘어「위험한 지경」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하고, 재정적자의 요인중 하나인 식품 보조금을 줄이기 위한 가격체제 개혁이 시급함을 강조한바 있다.
이런 의미에서 소련의 가격체제개혁은 경제문제인 동시에 정치·사회문제로 연결된다.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에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책은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이다. 【모스크바=정우량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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