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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재정 만능주의 현장 곳곳의 ‘보도블록 갈아엎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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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회룡기자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기자aseokim@joongang.co.kr

‘경로당에 남아도는 공짜 미세먼지 마스크’, ‘월세 받는 3층 건물주가 잡은 노인 일자리’가 대변하는 정부의 재정 만능주의를 지적하는 기사를 보도한 뒤 정부 부처 여러 곳에서 일하는 공무원에게 항의를 받았다. “현장 구석구석까지 예산의 온기가 퍼지지 않은 측면이 있다”면서도 “경기를 살리려고 열심히 예산을 편성해 풀고 있는 노력을 왜 몰라주느냐”는 취지였다. <본지 2019년 11월 13·14일 자 1·4·5면 참조>

취지가 선하다고 해서 결과도 선한 건 아니다. 밤늦게까지 한 공무원과 나눈 대화를 그대로 옮긴다.

“(노후 경유차 배출가스저감장치 부착사업 집행률이 낮다는 지적에 대해)정비소도 주 52시간 근무 체계를 지켜야 해 저감장치를 못 달고 있다(공무원)”→“기본적인 업무 조건조차 고려하지 않고 예산부터 짜선 안 된다(기자)”

“저감장치 부착 집행률이 떨어진 건 예산 집행이 늦어서다(공무원)”→“현장을 취재해보니 공업지대 한가운데 정비소조차 1년 동안 3대 부착한 게 전부라더라(기자)”

“예산 누수의 부정적인 부분만 부각했다(공무원)”→“나랏돈 검증은 가혹해야 한다. 90개 잘하고 10개 못하더라도 언론은 부족한 부분을 지적해야 맞다(기자)”

핵심은 올해 469조원, 내년 513조원 규모로 편성한 ‘슈퍼 예산’을 적재적소에 ‘잘’ 쓰느냐다. 보통 현장 취재는 좌충우돌하기 마련인데 이번 보도는 시행착오가 적었다. 정부 예산안 항목을 찬찬히 들여보다 ‘이건 문제가 있겠다’ 싶었던 부분을 취재하면, 여지없이 현장 누수가 드러났다.

공짜 미세먼지 마스크 보급 예산 항목이 대표적이다. 저소득층 246만명에게 1인당 연 50매씩 미세먼지 마스크를 보급하는 데 574억원이 들어간다. 당장 기자가 집 근처 아파트 경로당에 들렀더니 1년 전 나눠준 마스크 200장 중 150장이 박스째 남아있었다. 그런데 이달 중 또 마스크가 들어온다고 했다.

미세먼지 저감 대책의 하나로 경유차 폐차 보조금(예산 2896억원)을 받은 소비자는 “보조금을 받아 다시 경유차를 샀다”고 털어놨다. 멀리 특별한 곳을 일부러 찾은 게 아니라 출퇴근길 시내 고궁에서 마주친 노인 안내원은 “손주 용돈 벌이 나왔다”고 했다. 이런 단기ㆍ노인 위주 일자리를 만드는데 내년 예산 2조9241억원이 들어간다.

보도 직후 독자 반응도 뜨거웠다. 경기도 오산의 한 독자는 장문의 정성스런 e-메일을 보내와 “그동안 신문에 제보할까, 국민 신문고에 올릴까 고민을 많이 했다”며 “정류장마다 청소일 맡은 분들이 보라색 복지관 조끼를 입고 한두 분씩 앉아서 시간만 보낸다”고 말했다. 그는 “성실히 납세하는 입장에서 걱정이 많다”며 “진정한 복지는 꼭 필요한 곳에, 정말 일하고 싶지만, 여력이 없어 포기하는 젊은이와 불우한 어린이에게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기사에 달린 댓글 수백 개 중엔 주변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예산 낭비 사례가 많았다. ‘대전 시내 지하철역엔 아무도 찾지 않아 먼지가 쌓인 ‘안내 로봇’이 있는데 예산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경로당인데 예산을 써야만 해서 덥다고 해도 종일 보일러를 튼다’ ‘횡단보도에 안내하는 노인만 3명인 경우도 봤다’는 식이었다.

재정을 풀어 경기를 살리자는 취지에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일단 쓰고 보자”는 식 재정 집행은 2019년 판 ‘보도블록 갈아엎기’다. 경기 둔화 ‘선제 대응’과 ‘예산 낭비’는 한끗 차이다. 정부가 나랏돈을 헤프게 다루면 예산은 곧바로 줄줄 샌다. 섭섭해하는 공무원도 내 주머니에서 나간 돈이라고 생각하면 쓰릴 것이다.

김기환 경제정책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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