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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쏟아 만든 노인 일자리 "세 받는 3층 건물주도 일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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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 만능주의 그만 <상>

지난 6일 오후 3시 서울 중구에 위치한 한 어린이공원. ‘서울지방경찰청 등하교 도우미’라고 적힌 형광색 조끼를 입은 60대 2명이 조용히 벤치에 앉아 있었다. 이들은 가끔 휴대전화를 보거나 허공을 응시하기도 했다. 기자와 만난 A씨(당사자의 요청에 따라 익명 처리)는 “소일거리 삼아 보름 일하면 40만원 정도를 받을 수 있다길래 시작했다”며 “폭행이나 흡연을 하는 학생이 있으면 타일러서 귀가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공원에는 커피를 마시러 온 직장인 몇 명만 서성일 뿐 학생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들 중 한 명은 다리를 절뚝거리는 등 거동이 불편해 보였다.

“보름 소일거리 40만원 정도 받아” #내년 일자리예산 26조, 21% 급증 #학계 “무차별적 돈 살포 안된다” #노인 일자리 자격 까다롭지 않고 #근무 중 이어폰 끼고 음악 듣기도 #“총선 앞두고 선심성 예산 급증”

이처럼 세금으로 만드는 각종 ‘재정 일자리’ 예산이 급증하고 있다. 중복·유사 사업이 적지 않고 ‘단기 처방’ 위주로 재정을 집행하다 보니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12일 국회예산정책처의 ‘2020년도 예산안 분석’ 보고서와 추경호 자유한국당 의원실 등에 따르면 내년 예산안에 반영된 일자리 예산은 25조7697억원(이하 본예산 기준)이다. 2017년 전년 대비 8.1% 늘었던 것이 지난해와 올해 2년 연속 10%대로 증가하고, 내년에는 21.3%나 급증한 것이다. 이는 역대 재정지원 일자리사업 증가율 가운데 가장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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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일자리 같은 재정 일자리 사업 외에 돌봄·안전·특수교육 같은 ‘사회서비스 일자리’ 사업까지 포함하면 예산 규모는 더 커진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이와 관련해 “사회서비스 일자리에 소요되는 재정 규모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며 “일자리 창출을 위한 정부의 재정 투입 전체 규모가 축소돼 보이는 측면이 있다”고 짚었다.

세금으로 일자리를 늘리는 것은 고용 악화에 대비하고 취약계층을 지원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문제는 필요한 곳에 제대로 쓰이냐는 것이다. 정부가 일자리 지표를 개선하기 위해 남발한 노인 일자리의 경우 노후가 준비된 노인이 용돈 벌이로 할 일이지 생계형 일자리로 할 만한 일은 많지 않다. ‘소일거리’나 다름없는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어서 고용의 질은 물론 지속성 여부도 의문이다.

유경준(전 통계청장) 한국기술교육대 교수는 “재정 확대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쓸 돈을 쓰되 효과적으로 지출하는 정책 설계가 있어야 하는데 이 점에서 정부의 고민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서울시·복지부 등 겹치기 사업 … 현금 지원 예산 한 해 54조

지난 6일 정부의 노인 일자리 사업으로 고용된 안내 요원(형광색 조끼)들이 서울 시내 한 고궁의 야간개장 행사에서 관람객의 입장권을 검사하고 있다. 이들은 4~11월 임시로 일한다. 허정원 기자

지난 6일 정부의 노인 일자리 사업으로 고용된 안내 요원(형광색 조끼)들이 서울 시내 한 고궁의 야간개장 행사에서 관람객의 입장권을 검사하고 있다. 이들은 4~11월 임시로 일한다. 허정원 기자

6일 오후 9시 서울 시내 한 고궁 출입문에는 형광색 조끼에 빨간색 경광봉을 든 60~70대들이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이도 있었다. 이들은 야간 개장한 이곳을 찾는 관광객을 안내하는 일을 한다. B씨는 자신을 30년간 대기업에 다니다가 퇴직했다고 소개했다. 그는 “지금도 낮에는 컨설팅 관련 일을 아르바이트로 하고 있다”며 “손자들 용돈이나 쥐여주려고 하는 것이지, 생활비가 필요해서 일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말했다. C씨는 “주변 동료 중에는 서울 외곽 3층 빌라에서 세를 받는 건물주도 있다”고 귀띔했다.

점점 늘어나는‘재정 일자리’예산.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점점 늘어나는‘재정 일자리’예산.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노인 일자리는 자격 요건이 까다롭지 않다. 만 65세 이상의 기초연금 수급자이고, 정부가 추진 중인 일자리 사업에 중복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아니면 된다. 사업 유형에 따라 60세 이상도 가능하다. 소득인정액(소득+재산의 소득환산액)이 부부가구 219만2000원(단독가구는 137만원)을 넘지 않는 장년층은 참여할 수 있다는 얘기다. 노인 일자리 신청을 받는 기관 중 하나인 노인인력개발원 관계자는 “노인 100명 중 소득 하위 70명이 받는 기초연금을 수령하면 수입이 부족해 일자리가 필요한 사람으로 판단한다”고 설명했다.

유경준 교수는 “취업자 수를 떠받치겠다는 단기 성과에 집착하기보다는 꾸준하고 장기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데 돈을 써야 한다”고 조언했다.

실제 내년 재정 일자리 예산을 뜯어보면 직업훈련(8.9%)·창업 지원(9.2%)처럼 스스로의 능력을 키우는 간접지원보다는 단기적으로 고용지표를 올릴 수 있는 직접일자리(11.3%)·고용장려금(25.7%) 같은 직접지원 비중이 2배 이상 크다. 간접지원 비중은 올해보다 낮아지고, 직접지원 비중은 높아졌다. 취업자 증가 폭 등 명목상 지표가 개선되더라도, 비정규직이 급증하는 등 ‘고용의 질’은 되레 악화한다는 비판이 나오는 배경이기도 하다.

새로 추진하는 정책이 기존 사업과 겹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보건복지부는 내년 저소득층 청년의 자립을 돕기 위해 현금을 지원하는 청년저축계좌를 도입한다. 본인 저축액 10만원당 정부가 30만원을 매칭해 지원해주는 사업으로, 만 15~39세 기초생활보장 주거·교육급여 수급자 및 차상위계층 청년이 대상이다. 이는 서울(희망두배 청년통장), 전남(청년희망 디딤돌통장), 광주(청년비상금통장) 등 지자체의 사업과 내용이 유사하다.

늘어난 예산 47% 복지·노동에 몰려  

최근 4년간 현금성 지원 사업 예산 및 정부예산.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최근 4년간 현금성 지원 사업 예산 및 정부예산.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고용노동부의 ‘신중년 사회공헌활동지원사업’은 보건복지부 소관의 ‘노인일자리 사회서비스형’과, ‘일·가정 양립 환경개선 지원사업’은 ‘근로시간 단축 도입을 위한 지원사업’과 중첩될 수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 밖에도 예정처는 ‘산업예방시설융자’ ‘ICT 기반 사회문제해결 기술개발’ ‘임산부친환경농산물지원’ 등을 기존 사업과 중복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정치권에서는 내년 예산안에 현금성 지원사업 예산이 50조원을 넘어선 것에 대해 총선용 선심성 예산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 신용현 바른미래당 의원이 예결위 수석전문위원의 검토보고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내년도 현금성 예산은 54조3017억원으로, 전년(48조2762억원) 대비 12.5% 늘었다. 이는 정부 예산 전체 증가율인 9.3%보다도 큰 증가 폭이다. 불과 3년 새 관련 예산이 50.6% 급증했다는 게 신 의원의 설명이다.

현금성 지원 예산 사업에는 기초연금급여, 생계급여, 아동수당, 구직급여, 청년내일채용공제, 청년농업인 영농정착지원금 등이 포함된다. 교육·주택·의료 등에서 특정 재화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바우처를 제공하는 예산까지 포함한 내년 현금성 지원 예산은 63조7973억원에 달한다.

"정책과 중독 사이 분명한 선 그어야”

중복되는 주요 사업.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중복되는 주요 사업.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전문가들은 경기 대응을 위한 재정 ‘정책’과 재정 ‘중독’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국내 경제학계 최대 학회인 한국경제학회의 이인실 회장(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은 “재정의 역할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부처·지자체 간에 현금 살포식 재정지출이 벌어지는 것을 제어할 방안을 마련하면서 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과거 정부에선 통상 집권 초기에는 국가 채무비율을 높이다가도 후반에는 비율을 낮춰 관리해왔는데, 이번 국가재정운용계획을 보면 이런 관행을 깨고 매년 증가 추세로 바뀌었다”며 “정책 실패에서 비롯된 경기침체를 바로잡지 않고, 재정 확장에만 치중한다는 점에서 재정 ‘포퓰리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고 설명했다.

더 큰 걱정은 재정 여력이다. 내년 예산안의 특징은 크기도 크기려니와, 늘어난 예산 가운데 47%가 보건·복지와 노동 분야에 몰려 있다. 한 번 늘어나면 좀처럼 줄이기가 어려운 경직성 예산이다.

한국노동경제학회장을 지낸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원이 필요한 사람과 필요하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돈을 뿌리는 것은 재정 ‘포퓰리즘’을 확산시킬 뿐 아니라 경제 전체를 비효율적으로 만든다”며 “재정 및 복지의 효율성을 높이고 미래 세대의 경제 부담을 줄이도록 국회에서 꼼꼼히 예산을 심의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세종=손해용·허정원 기자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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