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한창 주가 오를 때 병역문제로 귀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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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일본에서의 바둑수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것은 1971년이었다. 제 3공화국시절 일부 고위층의 자제들 가운데 병역해당자들이 해외로 도피하고 일부 특권층들이 재산을 해외로 빼돌리는 등 사회문제가 일어나는 바람에 갑자기 해외 체류자에 대한 단속이 강화된 때였다.
한창 물이 오르기 시작하는 나의 바둑을 안타까워한 나월헌작 선생이 친구인 길야 당시 신 일본제철회장 등 일본 정·재계의 실력자들에게 부탁하여 나의 일본체류를 연장시켜 보려고 애를 쓰셨으나 안되었다. 길야씨 등이 한국정부와 교섭도 했으나『박 대통령의 허락이 없으면 안되니 직접 박대통령한테 말씀을 드려라』는 바람에 어쩔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의 나는 조치훈·소림광일 보다 위로 쳐주었다. 우전방부·가등정부·무궁정수 등은 선배로 약간 앞서 가고 있었으나 나는 초단시절부터 내 또래에서는 한 수 위로 기대와 촉망을 받고 있었다. 스스로 이런 말을 하기는 뭣하지만 이른바 제3세대의 선두주자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귀국한 뒤 일본사회의 실력자인 선생의 친구 분 하나가 1백 달러를 보내주며 안부를 물어왔다. 그는 3년 동안 꼬박꼬박 매달 1백 달러씩을 보내주며 안부를 물어봤는데, 아마 선생의 부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선생은 제자인 오청원 9단이 집이 없다는 것을 알고 당신의 집을 내주고 셋집을 얻어 나간 적이 있는 분이셨다.
일본으로 갈 때는 설마 우리말을 잊기야 하랴 싶었는데 3년쯤 지나자 완전히 다 잊고 말았다. 전통적인 일본집에 살면서 일본사람들과만 생활해온 탓이었다.
귀국해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언어문제였다. 『한국사람이 한국말도 모른다』고 욕도 먹였고 놀림도 많이 받았다. 우리말을 잊은 것은 어쨌든 내 잘못이므로 할 말이 없었다. 열심히 공부한 덕분에 한 1년 지나가자 그런대로 회복이 되었다.
하루는 한국기원에 나가면서 차비와 점심 값을 하려고 어머니에게 5백원만 달라고 했더니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5백원을 갖다주셨는데 옆집에서 꿔오신 눈치였다. 기가 막혔다.『아이쿠, 우리 집에 돈이 없구나. 옛날과 똑같구나』
우리집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고 내가 돈을 벌 수 있는 길은 바둑밖에 없었다. 바둑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이기는 도리밖에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였다. 이겨야 된다.
환경도 틀리고 바둑두는 습관이랄까 내용도 틀려서 귀국한 다음 한동안은 성적을 못 내고 있었다. 명인전에서 서봉수 명인에게 도전했으나 1승3패로 물러났고, 다른 기전에서도 승률이 안 좋았다. 여담이지만 서봉수 9단은 누구보다도 승부기가 강한 기사다. 타고난 승부사라고나 할까. 세번에 걸쳐 이른바「전관 왕」이 되었을 때도 가장 힘든 상대가 그였다. 호적수로서 좋은 도반이다.
그때 여동생이 성심여대에 합격했는데 입학금이 없었다. 나는 최고위전의 도전자가 되였고 마침 당시 30만원이었던 우승상금이 입학금과 똑같은 액수였다. 나는 결심했다. 이건 이겨야겠구나. 왕년에 많은 가르침을 받았던 김인국수를 이기고 우승했다. 1973년이었다.
최고위 타이틀을 딴 후 공군에 입대하였다. 하루라도 빨리 병역의무를 끝내는 것이 좋다는 주변의 충고에 따라 자원 입대했다.
최전방에 배치되었다. 바둑대회에도 나갈 수 없었다.
나중에 둘은 얘기지만 김수영 선배(당시 중앙일보관전기자)가 윤자중 공군참모총장을 만나 후방에 근무하면서 바둑을 둘 수 있게 배려해달라고 부탁했다 한다.
『조훈현처럼 장래가 기대되는 사람이 바둑을 못 두어서야 되겠습니까』
『유력 인사의 자제는 모두 전방근무를 하게 하는 것이 방침으로 되어 있습니다』
『조훈현 최고위가 어째서 유력 인사의 자제입니까. 본인이 유명인사지요』
여러 사람들의 노력과 이해로 공군대학 교수부 2처에 근무하면서 바둑을 두게됐다. 군인인 만큼 군기가 들어있어야 함은 당연했다.
「이기면 걸어서 들어오고 지면 영문 앞에서부터 포복으로 들어온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열심히 두어 높은 승률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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