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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필 지휘자가 10대들에게 “모든 음표에 행복 있어야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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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세계 무대에서 각광받는 지휘자 안드레스 오로스코-에스트라다가 1일 서울예술고등학교의 학생 오케스트라를 지도했다. [사진 서울예고]

세계 무대에서 각광받는 지휘자 안드레스 오로스코-에스트라다가 1일 서울예술고등학교의 학생 오케스트라를 지도했다. [사진 서울예고]

1일 오후 서울 평창동 서울예고 강당. 1학년 학생 50여 명이 모인 오케스트라가 자리에 앉자 누군가가 연단에 섰다. 최근 세계 무대에서 떠오르는 지휘자 안드레스 오로스코-에스트라다(42)였다. 10여년 전부터 빈 필하모닉, 뮌헨 필, 런던 심포니, 로열 콘세르트 헤보우 등의 초청을 받아 지휘했고 프랑크푸르트 라디오 심포니의 수석 지휘자, 미국 휴스턴 심포니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내년부터는 빈 심포니의 수석 지휘자를 맡을 예정이다.

남미 출신 오로스코-에스트라다 #빈 필하모닉 내한 공연 앞서 #고교생 오케스트라 레슨 자청 #“내가 10대에 받은 것 돌려주고파 #지금 중요한 건 음악이 주는 기쁨”

오로스코-에스트라다는 이번에 빈필과 함께 한국에 왔다. 3일 대구 콘서트하우스에서 그가 지휘한 빈필과 피아니스트 예핌 브론프만의 공연은 진작에 전석 매진됐다. 내한공연 후엔 일본에서 빈필과 함께 세 번 더 무대에 선다. 그런 그가 일부러 주최 측에 부탁해 입국 일정을 하루 앞당기고 고등학생 오케스트라 레슨 시간을 만든 것이다.

이날 서울예고 1학년 오케스트라가 고른 곡은 라벨의 ‘라 발스’. 세계적 지휘자 앞에서 처음 한 연주라서 학생들이 긴장한 탓일까. 시작 부분의 전형적인 3박 리듬이 뒤로 갈수록 자연스럽게 풀어져야 하는데, 그 변화가 다소 딱딱하고 부자연스러웠다.

오로스코-에스트라다가 다시 지휘봉을 들었다. “46마디부터 3박 리듬을 다시 해봅시다. 세 음을 똑같이 하는 게 아니라 두 번째 박에서 잠시 기다리세요. 그리고 템포는 미는 게 아니라 당기는 겁니다.” 그의 요청 후에 오케스트라의 음악은 미묘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콜롬비아 태생인 안드레스 오로스코-에스트라다는 14세에 지휘자로 데뷔했다.

콜롬비아 태생인 안드레스 오로스코-에스트라다는 14세에 지휘자로 데뷔했다.

그는 시종일관 넘치는 에너지로 학생들을 이끌었다. “조금 틀리는 건 괜찮아요. 음악이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아는 게 중요합니다. 연습은 집에 가서 하면 되니까!” 그는 학생들에게 기술을 강조하기보다는 음악의 흐름을 볼 수 있게 이끌었다. “뒤로 가면서 음악이 시끄러워지는데 너무 달려가는 것 아닌가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끝까지 한번 가보는 겁니다.” 좀 더 정교한 지시도 있었다. “그 부분에서 바순은 뒤에 세 음을 조금 더 느리게 해야 첼로와 만날 수 있어요. 이 부분은 연주하면서 저를 보세요. 그래야 완벽하게 하나가 돼 연주할 수 있습니다.”

오케스트라는 이 곡을 2주 전에 골라 세 번 연습했다. 10대들의 오케스트라가 짧은 시간 내에 소화하기에는 어려운 곡이다. 3박 리듬의 미묘한 변화, 폭발적인 사운드까지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로스코-에스트라다는 음악이 어려워도 마음으로 매진할수록 좋은 연주가 된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일깨웠다.

오케스트라에서 제2바이올린의 수석을 맡은 이채연 학생은 “그동안 생각했던 라벨과 전혀 다른 음악이었다”며 “우리끼리 연습할 때와 달리 오케스트라가 마치 노래하는 것처럼 바뀌어서 놀라웠다”고 했다. 양재무 교사는 “연습할 때 아이들이 리듬부터 멜로디까지 모든 것을 어려워했는데 오늘 그의 지휘 한 번에 음악이 달라져 있었다. 일부러 어려운 곡을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방한을 앞두고 오로스코-에스트라다는 한국의 젊은 오케스트라를 만나게 해달라고 내한공연 주최사인 WCN에 강력하게 요청했다고 한다. WCN은 음대생들의 오케스트라도 제안했지만 지휘자는 더 어린 오케스트라를 골랐다. 그는 “10대의 어린 연주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라고 했다. 콜롬비아 태생인 그는 열 살 무렵 청소년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하면서 음악을 시작했다. 14세에 지휘자로 데뷔할 때 역시 자기 또래의 유스 오케스트라와 함께였다.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할 때 나이 든 지휘자들이 종종 와서 마스터 클래스를 했는데, 그때 많은 것을 배웠다. 서로 듣는 방법, 생각하면서 연주하는 일의 중요성 등이다. 이제는 내가 받은 것을 돌려주고 싶다.”

그래서 그는 콜롬비아는 물론 미국 휴스턴과 오스트리아 빈, 또 연주 여행을 하는 많은 도시에서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찾아가곤 한다. “빈필과 함께 하는 연주 역시 중요하고 큰 무대다. 하지만 젊고 어린 오케스트라와 음악을 생각하는 시간은 나를 처음으로 돌아가게 한다. 그래서 이 시간을 꼭 마련한다.”

게다가 그는 클래식 음악의 변방인 남미에서 시작한 지휘자다. “무대 위에서 나는 늘 에너지가 넘치고 즐겁지만, 그 뒤에는 많은 고민이 있었다. 특히 10대엔 생각이 많아진다. 음악을 평생 할 수 있을까, 꼭 해야만 할까…. 이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 그 자체가 주는 기쁨이다.”

그는 이날도 학생들에게 이 점을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전곡 연주를 이끈 뒤 그는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이제 여러분 각자가 연습도 많이 하고 오케스트라 경험도 쌓겠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음악을 왜 시작했는가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잖아요. 모든 음표에 행복이 있어야 합니다.” 그의 마지막 말이 끝나자 학생들은 발 구르며 환호했다. “어디에서 어떤 연주를 하든 앞으로 여러분 모두가 음악과 함께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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