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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즐겨읽기] 영웅 없는 시대의 카타르시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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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은행나무, 전 2권, 각 400쪽·320쪽, 각 9400원·9000원

이 소설 참 묘하다. 처음에는 만화 같다가 나중에는 영화 같다가 책장을 덮을 때쯤이면 한 재간 좋은 이야기꾼의 입담에 휘말려 꿈을 꾸다 깬 것 마냥

다소 어리둥절해진다. 작가의 현란한 입심이 동반된 이야기의 힘. 소설의 정의를 이런 데서 찾는다면 이 책은 10점 만점에 9점은 줘야 할 것 같다.

작가의 이름은 오쿠다 히데오.

1959년생이니 올해로 만 47세다. 마흔 하고도 한참 후반에 이런 엽기발랄, 재치만발의 문체를 구사하다니, 요즘 애들의 감각을 주워다 냉동보관이라도 하는 게 아닐까.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하기사 국내에서 20만부 넘게 팔린 전작 '공중그네'(2005년, 은행나무)를 읽은 사람이면 그닥 놀라울 일은 아닐 터. 작가의 장기 중 장기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의 흡인력도 건재하다. '공중그네'에서는 환자 위에 올라타고 마구 주사바늘을 찔러대는 엽기 정신과의사 이라부가 등장했다. 그의 포복절도할 처방전을 통해 숱한 현대인들의 트라우마가 치료됐다. 이 소설에서는 과거 사회주의 운동권의 전설적인 행동대장이었다 무정부주의자로 전향한 아버지가 그 바톤을 이어받아, 영웅 부재의 시대에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아버지는 자칭 '프리라이터(자유기고가)'라면서 책은 한 권도 내지 않고 늘상 놀고 먹는, 일종의 '정치 백수'다. 그래도 입은 살아서, 하는 말마다 '어록'을 만들어도 될 법하다. "케첩과 미 제국주의는 우리의 적""콜라와 캔커피는 미국의 음모이자 독""경찰은 국가의 개""학교 따위는 다닐 필요 없다"…. 국민연금 납부를 독촉하러온 구청 여직원과 나누는 대화는 그중 압권이다.

소설의 첫 권은 툭하면 그런 아버지의 헤드록에 걸려 낑낑 대며 살아가는 초등학생 소년 지로의 성장담이다. 지로는 늘 왜 부잣집 딸인 어머니가 부모와 의절까지 해가면서 저런 아버지와 결혼했을까 지독히 궁금하다. 의문은 우연히 지로의 집에 신세지게 된 아버지의 후배로 인해 풀린다. 어머니는 오차노미즈 여대 운동권의 '잔다르크'였단다! (즉 부창부수란 얘기)

얼핏 몰락한 운동권에 대한 야유 내지는 씁쓸한 후일담의 색채가 느껴지던 소설은 2권으로 접어들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튄다. 남쪽 오키나와 인근 이리오모테섬으로 이주한 지로네 가족.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오지에서 이들은 자급자족의 생활, '슬로 라이프'를 구가한다. 그런데 섬에 리조트가 들어오게 되자 지로의 아버지가 리조트 건립 반대운동의 최전선에 나선다. 수십 년 만의 투쟁, 투쟁이다.

1권에서 '누가 좀 말려줬으면' 싶던 아버지는 공작새처럼 찬란한 날개를 드러내는데, 그 대사가 자못 감동적이다. "너는 아버지를 따라할 거 없어. 그냥 네 생각대로 살아가면 돼. 아버지 뱃속에는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벌레가 있어서 그게 날뛰기 시작하면 비윗장이 틀어져서 내가 나가 아니게 돼. 한마디로 바보야, 바보." 해마다 일본 서점 직원들이 선정하는 '2006 서점대상'에서 2위를 차지했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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