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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가의 노사분규를 지켜보면서…|최창섭 <서강대교수·언론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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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최근 첨예화 되어가고 있는 문화방송의 노사분규는 어떻게 보면 방송민주화를 향한 방송계의 제2의 도약과 발전을 위한 당연히 겪어야할 자연스러운 진통과정으로 이해 될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80년의 언론통폐합이라는 타율적 강압 행위에 의해 방송가의 전문성이 거의 말살되다시피 하면서 이제까지 일선 전문방송인들의 소리가 거의 무시당해왔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마술사들의 뜻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졌던 일방 통행식의 파행적인 방송운영은 결국 지나친 편향성 보도에 따른 방송의 공정성에 대한 시시비비를 낳았고, 한편으로는 정치성으로 물들여졌던 방송의 제 모습을 되찾으려는 자구책이 강구될 수밖에 없게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과정에서 보여준 노조의 역할에 대한 일면 긍정적 평가와 함께 또 한편으로는 파업으로까지 치닫게 되면서 시청자의 심기를 불안하게 하고있는 노사협약의 쟁점이 무엇인지, 또 분규타결의 관건이 무엇인가를 시청자 모두와 함께 정확히 조명 해 볼 필요가 있으리라 본다.
정점의 핵심은 편성국장과 보도국장을 소속사원들이 선출, 내지는 임명 동의권을 갖고 제작 관련 부서의 나머지 8명의 실·국장도 1년 후에 노조가 신임평가 내지는 징계 요구권을 갖겠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노조는 우선 무엇보다 현 경영진이 과거 낙하산 식으로 임명된 비 방송인에 의한 정부대변인격의 경영진이 아닌 민주적인 적법절차를 거쳐 선출된 전문 방송인이라는 사실의 인정에서부터 출발했으면 한다. 둘째, 현 경영진은 엄밀한 의미에서 사가 아닌 노로 인식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현 공영방송 체제하에서는 노노만 있을 뿐 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유념했으면 한다.
셋째, 방송경영권은 인사·편성권을 포함하며, 이는 선-권한 인정-후 책임추궁의 등식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이다. 인사·편성에 대한 재량과 자유가 경영자에게 우선 주어져야만 그에 따르는 책임이 부여되는 것이지 제3자가 인사권을 포함한 편성권을 행사하거나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친다면 바로 그 권한 행사자가 곧 책임추궁의 대상자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사실 이제까지 일선 방송인에게는 자유가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인 상부로부터의 명령만이 있었건만 막상 책임추궁은 일선 방송인들에게로 되돌아 왔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가 없는 책임감 강요야말로 우리 방송계의 고질적인 모순점으로 지적되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경영자의 재량권을 박탈하는 경영권 침해가 아닌 과거의 모순점을 시정하고 방송민주화를 실현하고자 함이 노조의 참뜻이라면 오른손으로 집 짓고 왼손으로 집을 부수는 듯한 인상을 주지 않는게 좋다.
단순한 0X식의 수량적 의견표시로 후보를 선출·추천하다 보면 자칫 경영책임자의 고유권한인 인사권을 침해 해 오히려 모처럼 추구하려는 방송민주화에 걸맞지 않은 결과를 초래할까 염려된다. 훌륭한 취지와 목적이 있다면 그에 걸 맞는 방법론이 뒤따라야 제격이 아니겠는가.
일선 방송인의 의사가 적극 반영되도록 민주적인 경영방식을 촉구하고자 함이 노조의 기본정신을 이루고 있다면 경영권이 위축당하지 않는 선에서 실무자의 의견이 집약·표출될 수 있는 적절한 질적 방법론이 모색될 수 있으리라 본다.
불행히도 우리는 간혹 논쟁을 벌이다 보면 어느 틈엔가 본론은 제쳐두고 독선적인 아집과 감정에 휘말리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러다 보니 방송민주화 과정에서 마땅히 존중되어야 할 준법의 틀을 벗어나 심지어는 법 테두리를 벗어나는 모순을 낳기도 한다. 역시 본론은 이제까지 소외되었던 방송인들의「소리」를 최대한 반영해야만 한다는 그「정신」존중이 아니겠는가.
그 본론적인 정신이 존중되도록 협약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그 정신에 위배되는 방법론을 택하다 보면 자칫 강압적으로 상대방을 극단적인 상황으로 모는 반민주적인 결과만 초래하지 않나 하는 걱정이 든다.
따지고 보면 그 동안 깊게 팬 부신의 늪이 골 깊은 피해의식으로 번지면서 노사협약의 심리적 장애요인으로 잠재의식 속에 깊숙이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주판을 놓다가 잘못 놓으면 툭 털고 다시 놓아야 하듯이 이제까지의 부신의 주판을 탁 털고 허심탄회하게 선-신뢰감으로 일단 다시 주판 앞에 앉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주판 앞에 손님을 초대하기 바란다. 즉 차제에 시청자 대변인을 초대하여 제3대화의 통로를 개설하기바란다.
그것이 노사협약의 자리이든, 아니면「공정방송 위원회」의 자리이든 시정자인 국민이 제3의 중재 역으로서 그들의 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기회가 마련되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동시에 시청자는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결코 아전인수격의 속죄양이나 피해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방송인만큼 방송을 잘 알고 수용자를 아끼려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일찍이 맹자는 양혜왕장귀에서 백성의 즐거워함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찾는 현인으로서의 군주를 논했고, 고자장귀에서 갯버들은 자기를 죽임으로써 술잔이 나바리를 만든다고 했다. 공자는 또한 살신성인을 설파했다.
때로는 자기자신을 끝까지 죽임으로써 냉철한 정신이 살아나기도 한다. 그리고 선중은 그 정신을 이해하고 즐거워 할 것이다. 선 중의 즐거워하는 표정에서 즐거움을 찾는 방송인이 될 때 방송인은 진정한 봉사자의 일원이 되며, 그 길이 민주방송을 지키는 최선의 방향이 될 것이다.
끝으로 차제에 관련 학계를 포함한「방송위원회」등 관계자는 제3의 대화통로로서 함께 매듭현상을 풀기 위한 대화에 적극 나서기를 촉구하는 바이다. 방송은 결코 방송인만의 것이 아니고 만인이 함께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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