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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의 발자취 따라|박영석 국사편찬위원장의 연변기행(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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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며칠동안 머물렀던 남호빈관을 떠나 연변으로 가기 위해 장춘 비행장을 향한 것은 8월11일 아침이었다.
장춘에서 연변조선족 자치주의 수도라 할 수 있는 연길 시까지는 비행기로 한시간 남짓,요즘 한창 TV나 신문 등 매스컴을 통해 연길시의 여러 모습들을 보아왔기에 다른 곳에 비해 궁금증은 훨씬 덜했지만 그래도 기대감은 큰 것이었다.
오늘날의 연변 조선족자치주는 조선후기에 통칭「북간도」로 불리던 지역이다. 북간도란 쉽게 얘기해서 두만강 대안의 중국 땅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반해 압록강 대안지역은 서간도라고 하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북간도는 혼춘·왕청·화룡·연길 등 4개의 현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이곳으로는 주로 함경도 사람들이 이주하였고, 반면 서간도에는 평안도사람들이 이주하여 오늘날에도 이 지역에 연고를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한다.
조선후기에 서간도나 북간도로 이주했던 사람들은 주로 경제적 이유에 의한 이민이었다. 즉 계속되는 흉년과 관리들의 가렴주구를 견디다 못해 생존을 위한 방편으로 이주를 결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동포망명 줄이어>
이들은 강한 개척정신과 불굴의 의지로 낯선 땅에 삶의 터전을 이루었고, 그러다가 일제에 의해 1910년 한국이 강점 당한 후로는 정치적 망명도 잇따라 이곳에는 제법 큰 규모의 한국인사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바로 이 서간도·북간도의 재만 한인사회가 이후 끊임없이 계속되는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근거지였으며 따라서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곳에 한번 와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지금 그 북간도의 중심지인 연변 땅을 향하는 것이었으니 그 기대감과 기쁨이 얼마나 컸을 것인지는 불문가지 이리라.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 선열들의 한이 맺힌 곳,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피 흘렸던 애국지사들이 잠들어 있는 곳, 그리고 아직도 그들의 후예들이 조국강산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곳, 바로 그 곳에 간다고 생각하니 심정이 자못 착잡하기도 하였다.
한 시간 후 드디어 연길 비행장에 도착한 나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곧 땅에 엎드려 흙에 입술을 대고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넘쳐 오르는 감격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구국의 책원지요, 성지라 할 수 있는 이 곳을 지난 40여 년간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면서 얼마나 와 보고 싶어했던가.
우리와 중국이 정치체제가 다르고 남·북이 분단되어 있는 현실 때문에 그토록 와보고 싶어했으면서도 오지 못했던 곳. 이제야 수십 년래의 소원이 성취되어 드디어 그 땅을 밟았다고 생각하니 흐르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다.
연길 비행장에는 연변대학의 박창욱·황용국 교수를 비롯한 사무처직원과 그밖에 여러분들이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안내를 받아 곧장 연길 시내에서 가장 시설이 좋다는 백산호텔로 향하였다. 연길 비행장에서 20∼30분 정도 걸리는 호텔까지 차가 달리는 동안 차창을 통해 내다 본 연길 시내는 마치 우리 나라의 지방도시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글로 쓰여진 간판이라든가 1960년대 초반의 우리 나라를 연상케 하는 거리의 모습들 때문 이었다. 곧 도착한 호텔의 이름 백산도 역시 한민족의 기원인 백두산에서 따온 것이리라 싶었는데,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무척 다정한 이름으로 느껴졌다.

<따뜻한 환대 받아>
여장을 푼 후에는 곧장 우리를 초청해 준 연변대학의 박문일 총장을 방문해 인사를 나누었는데, 중국 공산당의 책임서기라는 신현무 교수 등 여러 보직 교수들로부터도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점심식사를 그들과 함께 했다. 어찌나 차려놓은 음식이 많았던지 먹어도먹어도 끝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들은 음식을 가능한 한 많이 차리는 것이 손님을 정중히 대접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며, 대접을 받는 쪽에서도 조금은 남가는 것이 미덕이라고 한다.
현재 한국인으로서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약 5백만명 정도 된다고 하는데, 이 가운데 약 2백만명 정도가 만주지역의 동삼성, 즉 길림성·흑룡강성·요령성에 살고있다 한다.
이 같은 인구는 중국내 55개 소수민족 중 네 번째로 많은 것으로 이들 대부분은 조선후기와 일제강점기에 만주로 이민 갔던 사람들의 후손들이다.
중국에서는 소수민족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 자치구·자치주 등을 설정해 지방자치권을 주고 스스로 다스리도록 하고 있는데, 자치구로는 내몽고 자치구 외에 4개 구가 있고, 자치주는 길림성의 연변 조선족자치주 외에 28개, 자치 현은 하북성의 대창회족 자치현 외에 65개, 자치기는 흑룡강성의 악온극족 자치기 외에 2개가 있다고 한다.
연변이란 지명은 1920년을 전후하여 쓰이기 시작한 것으로 당시 이곳은 중국과 소련·한국의 접경지역에 위치해 있었고 연길판무 공서에서 관할했었다. 그러다가 만주사변 후에는 훈춘·화룡·왕청·안도와 함께 간도성에 속했었고, 1945년 8월에는 간도 임시정부, 같은 해 11월에는 연변 행정독찰전원공서, 1948년3월에는 연변 전구가 수립되었으며, 1952년에 연변조선민족 자치주를 거쳐 1955년에 이르러서야 오늘의 연변 조선족자치주가 되었다고 한다.
처음 연변조선족 자치주로 되었을 때에는 연길시 하나와 왕청·화룡·안도·용정현 등 5개현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1965년에는 도문시가 생겨나고 다시 1985년에는 돈화현이 돈화시로 승격하는 등 발전을 거듭하여 현재는 연길·돈화·용정. 훈춘·도문등 5개시와 장백·안도·화룡·왕청 등 4개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공내전 때 큰공>
이곳에 살고있는 한국인 약 1백만명 정도이고 종래에는 다른 민족과 한국인의 비율이 57대43 정도였으나 지금은 비슷하다고 하며 특히 화룡현 같은 곳은 70% 이상이 한국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한국인 가운데는 소위「해방전쟁」으로 일컫는 국공대립 때 공을 세운 사람이 많아 소수민족 가운데서는 가장 발언권이 강하다는 얘기도 들었다.
교육열에 있어서는 역시 이곳에서도 한국인을 따를 민족이 없다는 것이며, 연변대학을 비롯하여 정규대학이 4개, 중등직업 기술학교가 28개, 중학교가 2백51개, 소학교가 1천1백l8개,유치원 6백57개에 이르고 있다 한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간혹 중국어를 병용하기도 하나 대개는 한국어를 사용하며『연변문예』『소년아동』『주부생활』『연변교역』『재정과학』『아리랑』 등의 한글잡지와 함께 한글로 발행하는『연변일보』, TV방송국 등도 있어 문화적으로도 많은 활동을 하고있다.
얘기 듣기로는 길림에도『길림일보』와 길림라디오·TV방송국이 있고 요령성이나 흑룡강성에도 역시 한글로 된 신문이 발간되고 있다는 것이다.

<8·15는 노인절>
또 이곳의 한국인들은 우리의 전통적 생활풍습을 아직까지 그대로 지켜오고 있다. 요즈음 우리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옛 풍속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음력설·대보름·단오·한식·추석 등의 명절도 잘 지켜지고 있다한다. 단지 8월15일의 광복절을 이곳에서는 「노인절」로 기리고 있을 따름이었다.
우리민족의 뜻깊은 기념일이 제대로 되새겨지지 못함이 소수민족으로서 겪는 비애인 것만 같이 여겨졌다.
연길시에 도착한 날 오후에는 여행자의 향수를 어루만지듯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하였다. 빗속을 뚫고 용정의 용문교 위에서 벽암산을 뒤로한 해난강의 빗줄기를 바라보자니 가곡『선구자』의 한 귀절이 절로 떠올랐다.
일송정에 대해 물으니 지금은 없어졌다는 것이며, 말 타고 해란 강가를 달리던 선구자의 모습도 지금은 찾을 길이 없었다.
용정에는 한국인들이 처음 이곳에 이주하여 판 우물에서 그 이름이 연유되었다는「용정지명기원지정천」이라 새겨진 기념비가 서 있고, 한국인들을 고문하고 탄압하던 일본 총 영사관과 1919년 3월13일 만세행렬이 줄을 잇던 거리, 그리고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던 대성중학교 등 많은 유적지들이 남아있었다.
다음 일정을 위해 숙소인 백산호텔로 돌아오자 정판용 연변대학 부총장, 전 연변일보사장 최태호씨, 그리고 연변대학 역사계의 박창욱·최홍빈 교수,서 울대의 신용하 교수 등이 방문하여 다음 여행일정에 대해 많은 사전지식을 제공해 주었다. 자신들의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커다란 도움을 아끼지 않는 것을 보면, 이것이 하나의 핏줄이라는 민족적 유대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 분들의 배려와 정성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여행에서 체득한 값진 경험들을 앞으로의 연구활동에 되살릴 것을 혼자 다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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