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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엔 의심받고 북한엔 뺨 맞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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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노무현 대통령이 19일 청와대에서 안보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이날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유엔 안보리의 대북 결의안 관련 후속대책을 논의했다. 안성식 기자

한국은 국제 흐름과 달리 "압박 않겠다"
북 '상봉 중단' 위협에 "영구히 안 줄 수는 없고…"
이종석 통일 눈치보기

노무현 대통령이 19일 안보관계장관회의를 주재했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후 두 번째다. 하지만 회의의 결론은 '냉정하고 차분하게'라는 초기 대응 기조에 변함이 없음을 재확인했다. 노 대통령은 "과도하게 대응해 불필요한 긴장을 조장하는 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과도한 대응의 주체를 "일각"이라고 규정했다. 특히 회의에서는 남북관계와 관련해 대화를 통한 해결 기조를 재천명했다. 대북 압박에 나서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셈이다. 송 실장은 "압박 또는 대결을 통해 특별한 상황이 조성되는 건 우리 국익에 맞지 않는 방향으로 이용될 소지가 있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고집스럽기까지 한 정부의 이런 외교 기조는 국제 흐름과 따로 가는 것처럼 비치고 있어 우려를 낳고 있다.

미국과 일본 등은 유엔안보리 결의안 통과 후 추가적인 대북 제재 카드를 꺼내들고 있다. 대북 압박 동참도 은근히 권하고 있다. 반면 북한은 상황을 자꾸 악화시키고 있다. 안보관계장관회의 직후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을 일방적으로 중단하겠다고 선언해 우리 정부의 '성의'를 무색하게 했다.

정부가 원칙 없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는 비판도 있다. 북한이 상봉 중단을 통보한 직후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보다 이른 시간 안에 인도적 지원을 재개해야 한다고 보고 상봉도 빠르게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또 "우리가 영구히 (쌀.비료를)안 줄 수는 없고, 안 주면 이 사태는 영구히 해결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를 두고 정부 안에서조차 대북 협상의 주무장관이 북한의 협박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미.일과의 공조를 포기하면서까지 남북관계에 공을 들이는 정부의 노력은 아직 메아리를 듣지 못하고 있다. 그만큼 외교적 해법이라는 활로도 안개 속이다.

박승희 기자<pmaster@joongang.co.kr>

미국은 마카오 계좌, 김정일 통치자금 추정
"북 유엔 결의 거부땐 추가 압박조치"
강경파, 대북 선제공격 주장할 수도

북한이 미국의 금융제재로 마카오의 방코델타아시아(BDA)에 동결된 40여 개의 계좌를 풀어달라고 최근 요청한 것으로 확인됐다.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워싱턴을 방문 중인 박진 한나라당 의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박 의원이 19일 전했다.

박 의원에 따르면 힐 차관보는 북한이 미국의 금융제재 해제에 집착하는 것과 관련, "상당히 '개인적인(personal)'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퍼스널하다'는 힐의 표현에 대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했다. 마카오에 동결된 자금(2400만 달러)이 김 위원장의 통치자금일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힐 차관보는 또 방미 중인 천영우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에게 대북 추가 압박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밝혔다. 미국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와 6자회담 복귀를 거부한 북한을 더욱 구석으로 모는 방안을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천 본부장은 18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기자들에게 전날 힐 차관보와 로버트 조셉 국무부 군축.국제안보담당 차관 등과 접촉한 결과를 설명하면서 "북한이 유엔 결의를 수용하지 않고 6자회담을 계속 거부할 경우 미국은 추가 압박조치를 취하는 게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고 말했다.

미 행정부가 검토 중인 대북 압박조치는 다양하다. 스튜어트 레비 재무차관이 한국 측에 밝힌 대로 클린턴 행정부 시절 풀었던 대북 경제제재를 복원하는 것뿐 아니라 PSI 활동을 통한 북한 선박.항공기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북한의 돈줄을 한층 죄는 방안 등이 테이블에 올라 있다고 워싱턴의 외교소식통들은 입을 모은다. 게다가 의회 차원에선 이란.시리아를 대상으로 한 핵확산 금지 대상에 북한을 포함하는 내용의 법 수정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의도가 북한에 먹힐 수 있느냐는 점이다. 현재의 분위기로 볼 때 북한 지도부는 더욱 반발할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부시 행정부는 검토 중인 모든 카드를 꺼내 대북 전면 봉쇄조치를 취할지 모른다. 일부 강경파 중에선 대북 선제공격론을 다시 주장하고 나올 수도 있다. 그에 맞서 북한은 미사일을 새로 발사하거나, 핵 프로그램을 가속화할 소지도 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한반도의 위기는 더욱 높아지게 된다.

워싱턴=이상일 특파원<leesi@joongang.co.kr>

북한은 '이산상봉' 판 깨며 남한 뒤통수 치기
장관급회담서 쌀.비료 빠지자 불만
책임 떠넘기며 남북 긴장상태 조성

북한이 막 나가고 있다. 지난주 부산에서 열린 남북 장관급회담을 결렬시킨 데 이어 19일에는 향후 이산가족 상봉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 중단까지 위협하면서 남북관계를 험악하게 몰고 나간 것은 2000년 8월 첫 상봉행사 이후 처음이다. 북한은 먼저 13일 끝난 19차 장관급회담에서 쌀.비료지원 문제가 논의되지 못한 데 대해 불만을 퍼부었다.

장재언 북한적십자회 위원장은 편지에서 "귀측은 북남 사이에 상부상조의 원칙에서 인도주의적 사업으로 진행해 오던 쌀과 비료 제공까지 일방적으로 거부해 나섰다"고 주장했다. 이산상봉 판깨기가 대북 지원 유보조치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된 것임을 드러낸 것이다. 북측의 이번 주장은 이산가족 상봉을 북한이 철저히 남북 간 정치문제로 인식하고 있고, 대북 지원을 얻어내는 수단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이산가족들의 절박한 심정을 볼모로 노무현 정부를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북한이 거친 대남조치를 잇따라 내놓자 정부는 "북한이 다음엔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것이냐"며 당혹하고 있다. 정부가 장관급회담 결렬 이후 북한의 움직임에 대한 예상 시나리오를 토대로 면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정부의 안일한 대응에 대한 질타도 쏟아진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북한의 상봉 중단을 통보받고도 집무실에서 한 TV 방송사와의 대북정책 홍보대담 녹화에 매달렸다.

이영종.김성탁 기자<yjlee@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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