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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출하는 우리의 저력-바둑·기능·영화·레슬링의 낭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최근 우리 국민은 정치로부터도, 경제로부터도 아무 위로를 못 받으면서 짜증스럽고 울적한 나날을 지내온 것이 사실인데 정치가도, 고위층도 아닌 뜻밖의 인물들로부터 대단히 후련하고 신나는 격려를 받고있다.
그동안 정치 부재 속에서 잇단 밀입북의 충격과 살벌한 범죄의 창궐, 수출 부진과 실업증가 등 하나같이 우울하고 걱정스런 일만 겪어온 우리에게 일단의 젊은이들이 해낸 기능올림픽의 8연패, 김종신의 레슬링 금메달, 로카르노 영화제의 대상획득에 이은 조훈현9단의 세계바둑 제패 등은 마치 무더운 여름의 시원한 한줄기 소나기처럼 청량하고도 명랑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들 기쁜 소식은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고 이런 좋은 일을 해낸 주역들도 서로간에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공통되는 바탕을 느끼기 때문에 더욱 값지고 의미 있는 일로 평가하고 싶다.
그것은 한마디로 우리 국민 저력의 분출이다. 비록 정치가 방황하고 경제는 침체국면이라 하더라도, 사회가 시끄럽고 범죄가 극성이라 하더라도 국민 저력은 거대한 물줄기처럼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국민수준은 날로 높아 감을 이들 낭보는 느끼게 해준 것이다.
따라서 이런 국민적 역량을 생각하면 지금은 다소 어둡더라도 우리의 장래는 밝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고 문제는 이런 역량의 물꼬를 어떻게 열어 발현시켜 나가느냐에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기능올림픽에 대해서는 사실 전과는 달리 사회적 관심이 많이 떨어졌다. 보통사람들로서는 8연패까지 하리라고 기대를 걸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렇게 주시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 몇 해 사이 우리사회는 근면과 정진으로 자기분야에서 정성을 다한다는 자세보다 한 건 주의와 손쉬운 돈벌이·향락·유흥 쪽이 판을 치는 풍조가 만연돼 왔다.
그러나 기능올림픽의 메달리스트들은 이번에 그런 사회분위기에서도 묵묵히 자기 분야에서 완벽성의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음을 보여주었고, 결국 그런 자세로 나가는 것이 진정한 보람을 얻을 수 있게 해준다는 모범을 우리 사회에 보여준 것이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란 영화가 상을 받기 전까지는 그런 영화가 있었는지조차 아는 사람이 국내에 거의 없었다. 그리고 국산영화가 세계무대에서 그런 높은 평가를 받을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한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한 젊은 영화인의 집념은 하루아침에 우리 영화의 수준을 세계의 주목을 받는데 까지 끌어올리고 우리 영화인과 온 국민의 얼굴을 환하게 만들어 주었다.
조9단의 이번 응창기배전 우승은 어떤 의미에서 한·중·일 3국의 자존심의 싸움에서 우리가 이긴 것이다. 단순히 우리 바둑의 수준을 과시했다는 차원을 넘어 이런 바둑이 나온 한국에 대해 그들의 눈을 크게 뜨게 만든 것이다.
우리는 조9단, 배용균 감독, 김종신 선수와 기능올림픽 선수단에 새삼 축하를 보내면서 이들이 우리에게 준 격려에 감사 드리고자 한다.
이들이 이룩한 일은 모두 개개인의 탁월한 자질과 집념 속의 정진에서 나온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 국민의 자생적인 창조력과 에너지의 표출이기도 하다. 이런 창조력과 에너지면 2O세기말의 이 10년과 21세기를 다른 어떤 국민보다도 더 앞서고 훌륭하게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이번 일련의 낭보들은 우리에게 일깨워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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