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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프 하나로 188명 구했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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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이길봉씨가 관광객을 구조하기 위해 16일 한계령 옥녀탕 근처 급류를 건너고 있다. N-POOL강원일보=김남덕 기자

양동이로 물을 붓듯 비가 쏟아지던 16일 오전 7시10분. 이길봉(38)씨가 이끄는 8명의 설악산구조대는 강원도 인제군 북면 한계 2리를 출발했다. 장수대 등 한계령 일대에 고립된 수백 명의 관광객을 구조하기 위해서다. 세찬 물살이 앞길을 막았으나 관광객의 생사가 달린 문제여서 머뭇거릴 수 없었다.

국립공원 설악산사무소 안전관리팀 선임자인 이씨는 앞장서 불어난 계곡을 건넜고 망가진 산길을 개척했다. 접근하기 어려운 곳은 로프건을 쏴 계곡 건너편에 줄을 걸고 이를 의지해 간신히 건넜다.

2시간30분 만에 가까스로 옥녀탕휴게소에 도착한 이씨에게 시련이 닥쳤다. 자일을 몸에 걸고 옥녀 1교 옆 10여m 계곡을 건너려다 굽이치는 급류에 휩쓸려 50여m를 떠내려갔다.

"아찔했습니다. 그렇지만 나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까스로 고비를 넘긴 그는 조금 전의 공포는 아랑곳하지 않고 구조행군에 나섰다. 암벽을 타고 장수교 계곡을 우회하는 등 4개의 산봉우리를 돌아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던 시외버스와 승합차를 발견했다. 이때가 낮 12시48분. 이 버스는 전날인 15일 오전 9시쯤 장수 1교와 2교 사이에 있다가 두 다리가 모두 끊겨 고립됐다. 로프를 걸어 다리를 만들고 한 사람씩 구조를 시작, 이들이 고립된 지 29시간30분 만인 오후 2시30분 13개월 된 아기를 포함해 9명을 모두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버스기사 김철순(48)씨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공포 속에 하루 넘게 지내 모두가 지쳐 있었다" 며 "구조대를 보는 순간 '이젠 살았다'는 안도감으로 승객들은 서로 끌어안고 울었다"고 구조 순간을 설명했다.

이씨 팀은 이들 이외에 장수대 등에 남아 있던 38명도 무사히 한계리로 데려왔다.

이씨는 첫날 식량을 공급받지 못해 삶은 달걀 1개 반으로 허기를 때우며 12시간 넘게 구조활동을 벌여 피곤했으나 17일 또다시 구조활동에 나섰다. 다행히 물이 줄고 전날 설치한 로프 덕분에 작업은 순조로웠다. 이날도 한계령휴게소와 장수대에 남아 있던 관광객 141명을 구조했다. 이틀간 목숨을 건 구조작업을 끝낸 이씨는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속초에서 태어나 수학여행 가이드, 고산지대 가이드 등을 하며 1990년부터 한국산악회 설악산구조대 활동을 하던 이씨는 2001년부터 설악산사무소 안전관리팀에서 일하고 있다. 해외 원정길에 사고난 동료의 시신을 수습한 경험이 있는 이씨는 산악인 엄홍길씨가 이끄는 초모랑마(에베레스트의 티베트 이름) 휴먼원정대 선발대로 참여했다.

"위험한 일을 하고 나면 자신을 돌보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도 되지만 그래도 이 일을 할 수 있어 행복하다"는 이씨는 설악산을 찾는 이들의 친근한 벗을 자처하고 있다. 그는 이번 구조활동을 하면서 구르는 돌에 맞아 왼쪽 발목과 오른쪽 무릎에 부상을 입고 비를 맞아 몸살기가 있지만 병원 가기를 마다하고 피해 조사를 위해 18일 오후 2박3일 일정으로 설악산에 들어갔다.

속초=이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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