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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칼럼

"아무것도 안 하는 게 가장 큰 실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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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금융통화위원회의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 의자 뒤 벽면에는 대형 유화가 걸려 있다. 1950년 6월 제1차 금통위 회의장을 묘사한 이 그림은 혼란한 전쟁통에도 '금융시장은 우리가 지킨다'는 소명의식과 자부심이 담겨 있다. "현재의 금리는 여전히 경기부양 수준"이라는 이 총재의 비장한 발언과도 어울리는 그림이다.

이 총재를 보면 미에노 야스시(三重野康.1989~94년) 전 일본은행 총재가 생각난다. 두 사람 모두 40년간 중앙은행 핵심 요직을 거쳐 금융정책 수장에 오른 인물이다. 온갖 경제통계를 줄줄 꿰는 이 총재의 별명은 '장학퀴즈'. 미에노도 "금융은 미에노"라는 이름을 얻었다. 누가 뭐래도 "노(No)"라고 할 수 있는 분명한 소신도 공통점이다.

미에노는 1989년 말 총재에 올랐다. 당시 일본경제는 엔화 강세에도 기대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하고 물가는 어느 때보다 안정돼 있었다. 소비자 물가는 2% 남짓, 생산자 물가는 마이너스 근처를 맴돌았다. 그럭저럭 4%대 성장률에, 2%대 물가를 유지하는 지금의 한국과 비슷하다. 굳이 금리 인상이라는 도박에 나설 이유가 없었다.

당시 대장상은 차기 총리를 목전에 둔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였다. 자산을 두 배로 늘리자는 '자산배증론'을 내건 그는 틈만 나면 일본은행에 금융완화 압력을 넣었다. 금리가 오를라 치면 한은의 발목부터 잡고 보는 재정경제부를 연상시킨다. 최근에는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까지 "인위적 경기부양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압박하는 형국이다.

그래도 미에노는 "거품은 걷어내야 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사방의 압력을 물리치고 눈 딱 감고 금리를 올렸다. 그것도 1년 남짓 동안 2.5%에서 6%까지 끌어올렸다. 딱 2년 만에 일본의 거품은 완벽하게 붕괴됐다.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려온 사람들은 그를 "우리시대의 의적(義賊)"이라 부르며 열광했다. 일본 부동산은 그 후 12년간 단 한번도 상승하지 못했다.

요즘 일본에선 미에노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다. 거품 붕괴의 충격이 도를 넘자 한동안 "지나치게 과격한 대응이 화(禍)를 불렀다"는 비난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제 체력이 회복되면서 비난은 사라졌다. "그의 결단이 없었다면 10년이 아니라 20년을 잃어버렸을 것"이란 평가가 대세다. 일부는 "세계 4대 명(名)중앙은행 총재 반열에 오를 자격이 충분하다"며 열을 올린다.

물론 미에노가 그런 거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역사상 가장 걸출한 총재로 꼽히는 미국연방제도이사회(FRB)의 폴 볼커와 그린스펀 전 의장, 독일 분데스방크의 칼 오토 폴 전 총재. 모두 정권 교체에 아랑곳하지 않고 8 ~ 20년간 재임한 인물이다. 정치권의 비난에 꿋꿋이 견디며 사면초가의 경제를 지켜냈다. 폴 총재는 슈미트나 콜 총리가 끼어들면 "마르크는 내 소관이다. 당신은 정치나 잘하라"며 쏘아붙였다. 영국 파운드화를 마음껏 유린한 조지 소로스조차 마르크화에는 손댈 엄두를 내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일까. 소로스는 "분데스방크는 그들 자신의 방식대로 움직인다"며 꼬리를 뺐다.

요즘처럼 금융정책이 힘을 쓰지 못할 때도 없다. 금리를 살짝 건드려 본들 시장 반응은 시큰둥할 뿐이다. 그렇다고 미국처럼 기대심리를 겨냥해 단기간에 금리 변동폭을 급격하게 가져가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금리는 챙기지 않고 쓸데없이 남의 다리나 긁는 한은 총재들을 숱하게 목격했다. 뒷북치기와 말장난은 신물이 날 정도다. 요즘 이성태 총재가 회의실의 비장한 그림 앞에서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그러나 고민만 하며 머뭇거릴 때는 아니다. 폴 볼커 전 FRB 의장은 단호한 행동의 필요성에 대해 이렇게 주문했다. "(중앙은행이) 실수를 피하려면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최선이다. 그러나 나중에 돌아보면 그만큼 큰 실수도 없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