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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구장 미국 할배, 한국 떠나지 마이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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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2017년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롯데와 NC의 준플레이오프 5차전 시구자로 나선 케리 마허 교수. [중앙포토]

2017년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롯데와 NC의 준플레이오프 5차전 시구자로 나선 케리 마허 교수. [중앙포토]

지난 27일 서울 잠실구장 인근의 한 병원. 두산 베어스 투수 조시 린드블럼(32·미국)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사직 할아버지’로 유명한 롯데 자이언츠 팬 케리 마허(65·미국) 교수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린드블럼이 롯데에서 뛰던 시절(2015~17년) 우정을 쌓은 두 사람은 그간의 소식을 반갑게 풀어놨다. 하지만 내년엔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볼 수 없을 것 같다. 마허 교수가 한국을 떠나야 하는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롯데 열성팬 마허 교수 올해 정년 #홈경기 5년 개근, 흰수염 응원 인기 #두산 린드블럼과 5년째 우정 쌓아 #내달까지 직장 못 잡으면 비자 만료 #일부 팬들 모임 결성해 도움 손길

마허 교수는 사직구장에서 롯데 선수들 다음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키 1m88㎝, 체중 120㎏ 거구의 노교수가 흰 수염을 휘날리며 열정적으로 롯데를 응원하는 모습은 사직구장의 트레이드 마크다. 마허 교수의 지인인 김중희(39)씨는 “팬들의 사진 촬영 요청을 한 번도 거절하신 적이 없다. 하루에 300장 넘게 찍을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마허 교수는 롯데 구단의 초청을 받아 시구자로도 두 차례 나섰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가 고향인 마허 교수는 한국전쟁 참전용사의 아들이다. 2008년 울산의 한 초등학교에서 원어민 교사로 일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2011년부터는 대학에서 강의했다. 한국에서 홀로 지내는 그에게 야구 관전은 최고의 취미였다. 우연히 학생들과 함께 야구장을 찾았던 그는 한국 야구와 롯데의 응원문화에 흠뻑 빠져들었다. 강의시간까지 조정해 지난 5년간 사직 홈 경기는 한 번도 빼지 않고 관전했다.

27일 마허 교수를 만나러 병실을 찾은 린드블럼(왼쪽). [김효경 기자]

27일 마허 교수를 만나러 병실을 찾은 린드블럼(왼쪽). [김효경 기자]

얼마 전 물놀이를 하다 다리를 다쳐 수술을 받았는데, 병원을 일부러 잠실구장 근처로 잡아 입원했다. 마허 교수 간호를 돕는 김윤경(39)씨는 “휠체어를 타고 롯데 경기를 보러 야구장에 갔다. 교수님 롯데 사랑은 정말 대단하다”며 웃었다. 김중희씨는 “야구를 보러 다니는 비용은 모두 본인이 부담하신다. 강의를 통해 버는 돈이 많지 않아 병원비도 주변 도움을 좀 받았다”고 귀띔했다.

마허 교수는 롯데에 입단한 외국인 선수들의 도우미 역할도 자처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문화적 차이를 극복해야 하는 처지를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린드블럼과 친해진 것도 그런 계기에서다. 마허 교수는 2015년 롯데에 입단한 린드블럼의 가족의 한국 생활 적응도 도왔다. 마허 교수는 “린드블럼이 내게 처음 한 질문은 ‘아침 먹을 만한 식당이 있나요’였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린드블럼은 “외국에서 생활하는 건 외로운 일이다. 우리 가족과 한국을 방문한 부모님 모두 교수님의 큰 도움을 받았다”고 전했다.

린드블럼은 2016시즌 뒤 롯데의 재계약 제안을 거부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막내딸 먼로(3)가 심장병(형성저하성 우심증후군)을 앓고 있어서다. 다행히 건강이 좋아졌고, 린드블럼은 2017시즌 후반 대체선수로 롯데에 돌아왔다. 마허 교수는 “린드블럼이 떠날 때 슬펐지만, 가족을 위한 그 마음을 이해했다. 건강하게 돌아와 정말 기뻤다”고 말했다.

린드블럼은 지난해부터는 두산에서 뛴다. 마허 교수는 “두산이 내 두 번째 팀이다. 올해 포스트시즌엔 롯데가 없으니까 두산 우승을 응원하겠다”고 말했다. 다승·평균자책점·탈삼진 1위에 올라있는 린드블럼은 “내겐 (개인 타이틀보다) 우승이 가장 중요한 목표다. 야구는 팀 스포츠”라고 말했다. 린드블럼은 바쁜 시즌 중에도 시간을 내 마허 교수를 찾았다.

마허 교수는 올해 만 65세다. 대학교수 정년이 65세다. 다음 달 30일까지 직장을 잡지 않으면 비자가 만료된다. 그러면 2주 안에 한국을 떠나야 한다. 당장은 치료를 위해 체류 기간을 연장할 수 있지 장기 체류는 불가능하다. 마허 교수 친구인 조현호(50)씨는 “몸이 불편해서 최근 (한 직장의) 면접을 보러 가지 못했다”고 전했다.

마허 교수는 “난 65세지만 여전히 열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친다”며 “11년간 살아온 한국을 떠나 롯데와 한국 야구, 그리고 KBO 프렌즈(야구를 통해 한국에서 만난 친구들)를 볼 수 없게 되는 건 정말 슬픈 일”이라고 말했다. 린드블럼은 “롯데의 상징은 열광적인 팬이고, 교수님은 팬 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이다. 교수님이 떠난다면 롯데뿐 아니라 한국 야구로서도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마허 교수 처지를 염려하는 일부 팬은 모금 운동도 고려 중이다. 이를 위해 부산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벤자민 하(58)씨가 중심이 돼 온라인 커뮤니티 ‘케리 포에버’를 결성했다. 마허 교수는 “초등학교든 대학이든 관계없다. 일하면서 좋아하는 야구를 볼 수 있다면 행복하다”고 말했다.

김효경 기자 kaypub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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