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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로 밥 지어 먹으며 100명이 48시간 버텼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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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고작 10분 만에 모든 게 사라졌지." 강원도 한계령 자락 해발 1000m에 자리 잡은 인제군 한계3리에서 30년간 살아온 장봉환(59)씨는 17일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고추.감자 등 밭농사를 짓고 민박을 운영하는 장씨 등 마을 주민 300여 명의 삶은 15일 내리친 폭우로 산산조각이 났다.

15일 오전 8시50분쯤 새벽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빗줄기는 갑자기 장대비로 변했다. 폭 10m의 내린천은 계곡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로 순식간에 폭 50m의 '강'으로 바뀌었다. 장씨의 내린천변 민박을 삼킬 기세였다. 위험을 직감한 그는 "대피하라"고 소리치며 집을 빠져나왔다. 귀중품을 챙길 겨를도 없었다. 그의 집에서 민박하던 관광객 7명도 짐을 팽개친 채 둔덕으로 뛰어 올라갔다. 차를 몰고 대피하려 했지만 이미 도로와 다리는 휩쓸려 나간 상태였다.

10분쯤 지났을까, 인근 30여 채의 집이 흔적도 없이 쓸려 내려갔다. 물난리를 피해 집안으로 피했던 70대 이웃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도 함께 사라졌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장씨의 맞은편에서 "살려달라"는 외침이 울렸다. 2층 집 옥상에 대피해 있던 20여 명이 물이 발목까지 차오르자 구조를 요청한 것이다. 119구조대를 찾았지만 불통이었다. 다행히 산악구조 훈련차 와 있던 민간 구조대원 10여 명이 마련해준 로프를 타고 간신히 구출됐다. 10분만 늦었어도 모두 물에 휩쓸려갈 뻔한 순간이었다.

2시간쯤 지나자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그러나 큰길로 통하는 세 개의 다리는 모두 끊겨 외부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처지가 됐다. 한계령으로 올라가는 산악로만 남아 있었다. 장씨는 마을로 내려온 100여 명과 함께 인근 작은 암자로 피신했다. 빗물을 받아 밥을 짓고 먹을 물을 대신하며 버텼다. "장소가 좁아 잠을 잘 수 없었지만 비를 피하며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장씨는 말했다.

이튿날에는 그나마 있던 김치.장아찌 등 반찬이 떨어져 된장을 빗물에 풀어 국 삼아 배고픔을 달랬다. 오후가 되자 119 구조대원들이 로프를 이용해 구호물품을 보내왔다. "이제 살 수 있겠구나"라는 안도감이 처음으로 들었다고 한다.

고립 사흘째가 된 17일 오전 9시. 로프를 이용해 암벽을 타고, 물을 건너는 2시간여의 사투 끝에 이웃한 안전지역에 도착했다. 고립된 지 48시간 만에 삶은 계란으로 일단 허기를 때운 그에게 아직도 희망은 남아 있었다. "수저 하나 못 챙겨오고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래도 다행이지. 살아 있으니까. 사람 사는 곳인데 어떻게든 살 길이 있지 않겠어."

인제=권호 기자<gnomon@joongang.co.kr>
사진=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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