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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1의 거부는 재미동포|미 경제지 「포천」 특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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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동경=방인철 특파원】일본 제일의 부자 나카지마겐기치 (중도건길·68)씨가 귀화한 재일교포라고 해서 일본사회에서 화제다.
미경제지 포천이 최신호 (9월 11일자) 특집 「세계의 억만장자」에서 뽑은 세계적 자산가들 중 「평화공업사 사장 중도건설」이라는 생소한 이름이 당당 27위 (자산34억 달러)로, 31위(31억 달러)를 차지한 세이부 (서무) 그룹 쓰쓰미 요시아키(제의명) 회장을 누르고 일본 1위로 등장한 것이다.
나카지마 사장은 28일 니혼게이자이 (일본경제) 신문이 발표한 「89년판 일본의 자산가」 속에서도 자산액 5천억 엔으로 지난 4년간 1위를 차지해온 고마쓰시타 고노스케(송하행지조) 대신 톱의 자리에 올라 있다.
일본인들에게는 생소하지만 나카지마 사장과 평화공업사는 「빠찐꼬 업계의 신화를 창조한 재일 한국인과 메이커」로 관련업계서는 알만한 사람은 알고 있다.
나카지마씨의 정확한 금융 자산은 4천8백억엔(우리 돈으로 약2조4천억원). 지난해까지 일본내 랭킹 20위에도 끼지 못하던 그가 일약 제일의 부자가 된 것은 그의 회사 평화공업사가 지난해 8월 주식을 공개한 때문이다.
그는 총 주식의 80%에 이르는 4천만여 주를 소유하고 있으며 주당 가격이 1만2천엔 전후를 호가하고 있는 우량주다.
나카지마 사장이 창업한 빠찐꼬 메이커 평화공업사는 동경북부 군마(군마) 현 키류 (동생) 시에 소재한다.
그는 롤스로이스·벤츠 등 고급승용차를 타고 통근하며 먼거리 출장에는 전용 헬리콥터를 이용하기도 한다.
지난해 9월에는 한 사진 주간지가 부지면적 4백30평방m의 그의 저택과 영빈관을 공중 촬영하면서 『영빈관은 건물 본채만 7억∼10억엔, 실내 장식에 30억엔이 든 호화주택, 소장한 미술품도 무수하다』고 소개한 적도 있다.
그의 교유범위도 넓어 지난해 8월 동경제국 호텔에서 열린 주식공개 파티에는 후쿠다 (복전) 전수상, 미야자와 (궁택) 전장상, 오부치 (소연) 전관방 장관이 참석했고 경제계에서는 경단련 사이토(재소) 회장, 나카소네 (중증근) 전수상의 브레인 세지마 류조 (뇌도룡삼) 씨등과도 교분이 두텁다.
나카지마 사장은 이 같은 화려한 면보다 사실은 숨어 있기를 더 원하는 「서민적 사업가」다.
평화공업사의 종업원은 5백16명, 연 매출액이 5백8억엔, 경상이익 1백47억엔 규모. 일본 최대 자동차 메이커 도요타에 비해 매출액은 좀 떨어지지만 이익금은 3배를 넘는 수익성을 자랑한다.
이 회사가 만들어 내는 빠찐꼬 대수는 연산 65만대. 빠찐꾜업계 점유율은 40%를 차지, 약 18년 전부터 업계 톱의 자리를 지켜왔다.
나카지마씨는 그 자신 경영의 비결을 『노사신뢰·고객본위·연구개발』이라고 자신있게 얘기한다. 본사 건물앞에 세워진 그의 흉상도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종업원들이 돈을 갹출, 그의 회갑기념으로 세워준 것이다.
나카지마씨가 회사이름을 「평화」라고 한데는 이유가 있다. 21년 충북 청주출신인 그가 이른바 태팡양 전쟁 직전인 40년(19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겪은 갖가지 고생, 그때 본 전쟁의 참상과 식민지 체험이 「평화」를 꿈에도 그리워하게 된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일본에의 밀항으로 식민지 청년의 꿈을 키우려 했고, 고학으로 와세다대 상과중퇴, 척식대 상학부 졸업의 학력을 쌓기도 했다. 그러나 학도병으로 종전직전 전쟁터로 불려갔던 그는 해방과 함께 그대로 군대가 있던 현재의 키류시에 머물렀고 48년 20대의 빠찐꾜를 설치, 「평화상회」를 차려 현재에 이르렀다.
「일본제일의 부자」라는 그의 뼈아픈 재일 한국인으로서의 기억이다.
그는 6·25의 참화를 멀리서 보면서 귀국을 포기, 일본인으로 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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