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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1부 독립을 위하여|아버지는 일인과 상종안해국교지어준 조부 손녀 등교 막아|형의 장인은 김창숙씨에 독립운동자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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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우리조선이 일본하고 싸워야한다?…』
그 때 형은 나에게는 최대이상의 인물로 생각되었다. 나도 크면 형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고 나도 빨리 커 서울에 가서 공부하고 싶었다. 그래서 형이 오면 어디든지 늘 쫓아다니곤 했다. 다만 형이 형수방에 들어갈 때만 나는 피해주었다.
이상하다. 학교에 가면 일본말을 국어라고 가르쳐주고 일본국기에 절을 하라하면 『예!』하고. 얼굴이 무릎에 닿도록 머리를 숙여 모두 절을 하고 있는데…. 이것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데…. 우리형이 왜 머슴들한테 밤에 가만히 가서 그런 소리를 할까? 학교(지금의 단계국교·당시는 신등공립보통학교였다)는 동네 앞에 있는 우리집 논을 기부하여 지어주었기 때문에 나는 우리집에서 학교까지 남의 땅을 밟지 않고 통학했다. 할아버지는 우리 땅을 주고, 또 돈까지 기부하여 학교를 지어주었었다. 그러고도 여성이 신학문을 하는데 반대해 아버지가 학교에 입학시킨 우리 누이 둘은 기어이 학교에 못 가게 하였다.
할아버지는 내가 일곱살 때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나에게 제일 처음 「하늘 천 따지」를 가르쳐주신 분이다. 나를 제일 귀여워하여 주셨다. 나의 이름 갑동도 내가 할머니 환갑년에 태어났다고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나는 그렇게 건강하시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사람은 왜 죽는가. 결국 사람은 죽는 것이로구나 생각했다. 그렇게 훌륭하시고 얼굴이 잘났다는 증조부님, 대사간(대사간)까지 하셨다는 증조부님은 내가 날 때에는 이미 돌아가시고 나는 얼굴도 보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증조할아버지를 닮았다고 더욱 귀여워하신다는 말을 할머니·어머니에게서 들은 일이 있다. 할아버지 장사때 사람들이 어떻게 많이 모였든지 장지까지 가는데 사람들과 말·당나귀행렬이 오리나 계속되었었다.
나는 우리나이로 여덟살 때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교장은 성이 지씨라서 동네사람들이 지교장이라고 불렀는데 내 귀에는 그것이 이상하게 들렸다.
우리아버지는 1936년까지 단발을 하지 않으시고 상투에 갓을 쓰고 계셨다. 동네에서 소공자(소공자)라 일컬을 정도로 도덕군자이셨다. 한 동네에 사는 권씨 등 양반들은 『참봉어르신』하고 불렀고 장터사람들은 『나으리』하며 허리를 굽실거렸다.
우리동네는 남북으로 한가운데 자동차도로가 나있었다. 남쪽으로 가면 단성과 진주로 통하였다. 동네한복판쯤에 경찰관주재소가 있고 그에 붙어서 일본인잡화상점이 있었다. 여기에서 진주로 가는 버스표를 팔고 있었다. 그 남쪽으로 몇 집 건너 학교가 있고 학교 정문 앞에 면사무소가 있었다.
나는 우리아버지가 주재소나 면사무소·장터에 한번 가시는 것을 본 일이 없다. 일본이 지배하는 관청이나 일본인이 있는 굿에는 절대 가시지 않았다. 면사무소에 일이 있으면 면장을 우리집 사랑방에 직접 부르시는 것이었다. 주재소 일본인 소장이 첫부임하여 집에 인사하러오면 아버지는 안으로 피해버리고 일보는 사람을 시켜 대접하여 보내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우리아버지는 일평생 일본사람을 만난 일도 없고 일본사람과 대화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일본말은 조금 아는 것 같았다. 옛날 서울에 가서 신학문을 하였다하는데 나는 거기에 대해 아버지에게 물어본 일이 없다. 그래서 내가 일본어 교과서를 소리내어 읽을 때 「다쿠상」(많이) 이라고 발음하면 그것은 쓰기는 「다쿠상」이라고 써도 「닥상」이라고 읽어야한다고 가르쳐주시기도 했다.
신문은 동아일보를 보는데 두고두고 같은 기사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읽으셨다. 동아일보가 배달이 안되면 조선일보보는 집에 사람을 보내어 꼭 그 날 신문을 봐야하는 성미였다.
아버지는 매일 한번은 꼭 나를 자신의 방에 불러들였다. 그러나 나는 될 수 있는대로 아버지를 피하려하였다. 아버지방에 들어가면 적어도 두시간은 설교를 들어야했다.
인간의 수신제가(수신제가)로부터 우리집 역사, 우리나라역사, 중국 역사, 일본 역사, 그리고 역사상 걸출한 인물들의 이야기다. 나만 그러는 것이 아니고 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형은 아버지설교만 듣고있지는 않았다. 자기 의견을 서슴지 않고 이야기하니 대토론이 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저 애는 점점 즈그 장인 「대포」영감을 닮아 품이 과한데』하고 형을 걱정하는 소리를 들은 일이 있다. 형은 하동한재의 정재완이란 3천석꾼집에 장가들었었다. 정재완은 스케일이 너무 큰 사람이었다. 그래서 별명이 「대포」였다.
그의 저택은 경남에서는 제일 크며 그 당시 집안에 자가발전기를 설치하여 촌에서 전등불을 켠 것으로 유명하였다.
그는 그것 뿐만은 아니었다. 상해임시정부와 국내 독립운동가들간의 연락장소로 하기 위하여 동래에 산해관이라는 요리집겸 여관을 지어 그들의 연락처와 아지트로 제공하였다. 신성모 (초대국방장관)가 선원으로 상해에서 부산에 와이 산해관에 들러 정치자금을 받아갔다 한다. 그때 신성모의 이름은 신철이라 하였다 한다.
독립운동가 김창숙이 상해에서 국내에 잠입했을 때 정재황은 임시정부정치자금으로 7백원을 주었었다. 이 사실은 우리동네에서 시오리쯤 떨어진 나무리에 살고있던 유명한 한학자 김중재도 이야기하였고 김창숙 본인도 해방후 친지들에게 말한바있다.
그리고 의령실뫼의 안배제가 부산에 백산상회를 설립하여 상해임시정부와 국내독립운동가들을 도울 때 정재완은 동지로서 안배제의 백산상회에 많은 돈을 출자하여 주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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