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흑인이 있다. 미국 시카고의 낙후된 지역 사우스 사이드에서 홀어머니와 유년 시절을 보냈다.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이 일어나기도 전, 백인과 흑인이 화장실을 따로 쓰던 시절이었다.
불평등 경제학 대가 글렌 라우리 교수 #일자리 만들 사람에 몰수적 세금 #과거에도 해봤지만 실패한 실험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장만 교란 #임금보조금제가 고용에 더 도움 #한국 자사고 폐지는 모두가 손해 #미국도 우수 학생들은 따로 관리
온갖 차별에도 그는 열심히 공부했고 1982년 33세의 나이로 하버드대 경제학과 역사상 첫 흑인 종신교수로 임용됐다. 글렌 라우리(71) 현 브라운대 교수 얘기다. 그는 경제학 이론을 활용해 편견·차별·불평등 문제를 평생 연구해 온 대가다.
라우리 교수는 ‘정체성 선택(identity choice)’ 이론으로 유명하다. 이 이론은 종족·언어·종교·연고지 등으로 차별받는 집단에 속한 사람이 주류의 정체성을 선택하는 방법으로 자신에게 고착된 나쁜 이미지를 탈피해 결과적으로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지난 8~9일 한국경제학회 국제학술대회 참석차 방한한 그를 대회가 열린 서울 마포구 서강대에서 만났다.
- 당신의 ‘정체성 선택’ 이론은 이른바 잘 나가는 사람에겐 좋겠지만 뒤처진 사람에겐 안 좋은 일일 것 같다.
- “흑인·재일교포 등 과도하게 낙인찍힌(stigmatized) 그룹에 속해 있다면 주류 그룹에 동화하는 게 효율의 관점에서 볼 때 긍정적이다. 적어도 능력 있는 소수에겐 말이다. 흑인이 주류사회에 편입하고 재일교포가 일본으로 귀화하면 ‘배신했다’는 말을 들을 수 있겠지만 그 개인으로서는 풍요로워지고, 불평등이 줄었다고 볼 수도 있다.”
- 그럼 낙오되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어떡하나.
-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책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사람이 무슨 인종, 무슨 그룹 소속이냐 하는 것으로 나눈 정책이 아니라 오로지 그 사람이 가난하기 때문에 지원하는 정책이어야 한다. 미국에는 가난한 백인도 많다. 많은 정책 수단이 있다. 교육이 그 첫 번째다. 부자 부모를 뒀다는 이유만으로 그 아이가 좋은 교육을 받는 건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의료 지원, 직업 훈련, 임대주택 확충 등이 다 중요하다.”
- 당신은 흑인 지도자들을 비롯해 미국 민주당에 비판적이다.
- “민주당 대선후보들이 부유세 신설을 주장하고 있다. 최악의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고용과 부를 창출하는 사람들에게 몰수적 세금을 부과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그들이 나라를 등지게 하는 것이다. 그런다고 서민 삶이 나아지지도 않는다. ‘정의 실현’ 같은 구호만 남을 뿐이다. 이런 사회주의적 실험을 우리는 과거에 해봤고, 또 실패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안다. 한국이 좋은 사례다. 집단 통제 경제체제를 한 곳(북한)과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한 곳(한국) 중 어디가 더 잘살게 됐는지 모두가 다 안다.”
- 한국에선 최저임금을 올렸더니 소상공인들이 힘들어한다
- “최저임금은 지지하지 않는다. 노동시장에서 자원 배분을 교란시키기 때문이다. (노동 수요를 줄여) 취직할 수 있는 사람을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나는 임금보조금(wage subsidies) 제도를 선호한다. 고용주가 직원 고용하기를 꺼리게 해서는 곤란하다.”
- 당신은 아시아계 학생들이 하버드대가 선발과정에서 역차별했다는 소송에서 아시아계 학생들 편을 들었다.
- “아시아계 미국인의 성공은 그들뿐 아니라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공이다. 하버드대 측은 ‘성적만 보는 게 아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시안 중에서도 낮은 성적, 높은 리더십 스킬을 가진 학생이 있을 수 있고, 흑인 중에서도 높은 성적, 낮은 리더십 스킬을 가진 학생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자가 합격하고, 후자가 불합격하는 경우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버드대의 설명은 변명에 불과하다.”
- 한국에선 자사고 폐지가 진행 중이다.
- “미국에도 영재학교가 있고, 대학과목 선이수제(Advanced Placement) 시험이 있어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따로 관리한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위한 학교를 없앤다고 하면 그들과 학부모들은 그런 학교가 있는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고 싶을 것이다. 또 공교육 대신 사교육을 선호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모두가 손해를 보게 된다. 우등생 열등생을 모두 한 교실에 묶어두고 싶은 정책적인 욕구를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우등생의 발을 묶어 못 달리게 하는 건 합리적인 정책은 아니다.”
- 한국경제에 조언한다면.
- “7년 만에 다시 한국에 와서 기쁘다. 늘 발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 좋다. 특히 자유로운 경제 활력이 이렇게 발전과 번영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게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이런 업적을 부자들에게 세금을 매기는 방법으로 성취하지 않았다.”
글렌 라우리 교수
1948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나 노스웨스턴대를 졸업한 뒤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82년 하버드대 경제학과 최초의 흑인 종신교수로 임용됐다. 이후 케네디 공공정책대학원, 보스턴대를 거쳐 현재 브라운대 경제학과에서 연구하고 있다.
박성우 기자 blast@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