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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연금 내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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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강주안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주안 사회에디터

강주안 사회에디터

여름이면 TV에 납량특집이 나오곤 했다. 재산이나 가족처럼 소중한 걸 빼앗긴 귀신은 한기를 뿜었다. 아픈 부모에게 주려고 묘지에서 시신의 다리를 잘라 도망치는데 뒤에서 귀신이 “내 다리 내놔라”하며 쫓아오는 장면에 등골이 서늘했다. 귀신 얘기가 스친 건 나이가 들수록 간절해지는 국민연금에 경고음이 울린다는 얘기가 들려서다. 한·일 갈등같이 큰일이 터지면 어김없이 ‘연금 타격’ 뉴스가 나왔다.

전주 이사한 국민연금 운용조직 #2년반 지나도 ‘금융중심지’ 난망 #전북과 국민 함께 사는 길 찾아야

연금 문제가 실제로 심각한지 전·현직 국민연금 직원과 금융계 인사들에게 물었다. 상당수가 한숨을 쉬었다. 가장 큰 우려로 금융 전문가가 모인 기금운용본부를 전북 전주로 이전한 걸 꼽았다. 2017년 2월 서울에서 전주로 이사한 지 2년 반이 지났지만 희망이 안 보인다고들 했다. 지난해 9월 미국의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이 전주가 너무 멀다는 지적과 함께 ‘주변에 분뇨 냄새가 난다’고 보도한 건 충격이었다.

전북 전주에 있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건물.

전북 전주에 있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건물.

기금운용본부 측은 “안정을 찾고 있다”고 반박한다. 우수 인력 확보도, 해외 전문가와의 교류도 착착 진행 중이라고 말한다. 전주 이전은 2012년 대선 때 공약으로 떠올랐다. 문재인 대통령은 당 대표 시절이던 2015년 9월 전북을 방문해 이렇게 설명했다. “기금운용본부의 전북 이전은 지난 대선 때 저의 공약이었다. 제가 공약을 하자 박근혜 후보가 뒤따라 공약을 해서 전북 이전이 확정되었고 ….” 기금운용본부는 탄핵을 한 달 앞두고 박근혜 정부가 전북에 보낸 마지막 선물이 됐다.

서소문 포럼 8/13

서소문 포럼 8/13

과연 기대만큼 발전하고 있을까. 확인을 위해 지난 7일 기금운용본부를 찾아갔다. 서울 용산역에서 오후 2시 10분 출발 KTX(요금 3만 2000원)를 탔다.

용산발 익산행 KTX 기차표. 서울에서 국민연금에 갈 때 전주역보다 익산역을 더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용산발 익산행 KTX 기차표. 서울에서 국민연금에 갈 때 전주역보다 익산역을 더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국민연금 측 안내대로 익산역에 내리니 바로 앞에 국민연금행 버스(3100원)가 다닌다. 배차 간격이 1시간 이상이다.

익산역 앞 버스 승강장에 게시된 버스 시간표. 국민연금을 가는 혁신도시행 버스의 배차 간격이 평균 1시간 이상이다.

익산역 앞 버스 승강장에 게시된 버스 시간표. 국민연금을 가는 혁신도시행 버스의 배차 간격이 평균 1시간 이상이다.

그래서 대개 2만원 넘는 요금을 내고 택시를 탄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논 사이를 지나 40분 정도 달리니 국민연금 건물이 나타났다. 주변이 휑해 금융 중심지 느낌은 안 났다. 기금운용본부 측 인사들과 한 시간 남짓 대화하니 퇴근 방송이 나온다. 반나절 일정은 무리였다.

전북 전주에 있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건물.

전북 전주에 있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건물.

기금운용본부 측은 다 잘되고 있다고 했지만 전·현직 직원들의 얘기는 달랐다. 맞벌이거나 취학 자녀가 있을 경우 혼자 내려온 경우가 많았다. 유능한 전문인력을 붙잡기엔 어려운 여건이다. 전주 이전을 준비하던 2015년 이후 100명 넘게 퇴사했다. 전체 운용인력은 250명 정도다. 자산을 불릴 때 운영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쉽게 확인된다. ‘펀드닥터’에서 국내 주식형 펀드의 지난 3년 수익률을 비교해보면 실적 좋은 펀드는 70% 이상 번 반면 저조한 경우는 40% 넘는 손실을 봤다. 기금운용본부에 우수한 운용역이 많아야 우리의 노후가 덜 괴롭다. 2017년 기준 국내 전문인력은 투자분석가 1095명, 자산운용가 623명뿐이다. (『국민연금 스튜어드십 코드의 진실』) 이 중 기꺼이 전주로 갈 인원이 얼마나 될까.

해외 전문가와 교류가 어렵다는 점도 큰 문제다. 국민연금 측은 “곧 외국 회사 지점도 생기고 해외 전문가의 방문이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금융권에선 냉소적이다. 700조 가까운 자금을 유치하려는 움직임일 뿐 연금의 미래를 밝혀줄 전문가는 아닐 거라고 본다. 한 해외 운용사 관계자는 “기금운용 전략에 도움이 될 전문가들은 대개 해외 출장 일수에 제한이 있다”며 “한국에 가면 서울은 들르지만 하루를 더 쓰며 전주까지 가기는 어렵다”고 설명한다. 거기에 보건복지부와 기획재정부의 통제, 국회의원들의 과도한 간섭 등 운용의 자율성을 옥죄는 고질적 요소들은 그대로다.

국민연금 기금은 2057년에 고갈될 거로 예상한다. 이후엔 보험료가 크게 오른다. 이 무렵 60대에 접어드는 ‘90년대생’이 기금 고갈 1세대가 되리라.

암울한 미래에 조금이나마 희망을 찾을 수 있도록 700조를 운영할 전문가들을 수도권에 근무하게 할 순 없을까. 제주로 이사한 공무원연금공단이나 전남 나주로 떠난 사립학교교직원연금공단이 기금운용부서만큼은 서울 강남과 여의도에 두고 간 이유를 짚어볼 순 없을까. 전북에 피해를 안 주면서 국민의 노후도 챙기는 묘안은 없을까.

정치권이 오류를 인정하고 대안을 수용하는 경우가 드물다는 걸 알지만, 늘그막에 아픈 몸을 끌고 “내 연금 내놓으라”며 기금운용본부 주변을 떠도는 신세가 되기 싫어서 해보는 말이다.

강주안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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