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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같은 … 고향 같은 … 아련한 첫 작품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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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수동의 ‘멜랑꼬리’ (1989), 이석주의 ‘자화상’ (1972), 김중만의 1975년 사진 작품, 지석철의 ‘투계(鬪鷄)’ (1972), 황주리의 ‘추억제’ (1982).

이제는 이름값이 좀 나가는 화가가 맨 처음 그린 그림은 무엇이었을까. 화가의 첫 작품이 궁금해질 때가 있다.

첫 사랑이 그렇듯, 첫 작품은 설렘과 불안과 갈망으로 풋풋하다. 작가에게 초기작은 고향과 같다.

한 작가의 작품세계는 많은 변화를 겪는다 해도 첫 단계에 이미 싹을 다 본 경우가 많다. '역시 초기작이 좋았어' 라는 말을 듣는 작가도 있다. 정말 그럴까.

서울 충무로 세종갤러리가 기획한 '내 생애 첫 작품을 소개합니다'전이 이 물음에 답한다. 11명 중견 화가를 초대해 그들의 근작과 초기작을 나란히 걸었다. 화가 스스로 고른 초기작이다. 시간으로 따진 첫 작품은 아니라는 얘기다. 화가 자신이 '이것이 내 이름을 달고 나간 최초의 작품'이라 여기는 '그때 그 그림'이다.

화가가 쓴 '첫 작품론'이 붙어 있어 그림과 더불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젊은 날, 미술에 대한 연가처럼도 들린다. 이수동씨는 초기 시절을 "아마도 내 생애 가장 부지런했던 나날이었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너무 가난해서 액자도 직접 만들고 전시장 대관료도 나중에 갚았다. 그 가난했던 날, 첫 개인전에 걸었던 작품 '멜랑꼬리'를 내놓은 그는 "그 '처음처럼'을 잊지 않으려고 이 '멜랑꼬리'를 늘 작업실에 두고 있다"고 썼다. "지금 (내 작업의) '따뜻함'은 그때부터 줄곧 잊지 않고 행하고 있는 '들이댐' 덕"이라며 "'들이댐'은 '열정'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겠는가"라 했다.

지석철씨는 대학 저학년 시절의 '투계'를 내놓고 "젊음과 패기가 나의 감성과 잘 어우러져 있음을 느낀다"고 돌아본다. "철저하게 계획적이고 치밀한 근래의 작업을 보면서 가끔씩 그 시절의 희망과 도전적 열기가 그리워지기도 한다"고 한숨짓는다.

"이 그림은 내 생애 첫 작품이라기보다는 내 생애 가장 우울했던 젊은 날의 초상"이라 한 이는 황주리씨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축제의 순간들이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굶주리고 죽고 술마시고 사랑하는 너와 나의 초상들"이라 이름지은 '추억제'다. 작가는 '추억제'를 "이후 내 작품 세계의 원형"이라고 설명한다.

김덕용.김찬일.박항률.안윤모.이석주.장혜용.정현숙.최석운씨도 각기 그림으로 각인된 첫 작품을 내놓았다. 전시는 21일부터 8월 15일까지. 02-3705-9021.

15일부터 8월 16일까지 경기도 양평 사진갤러리 와(瓦)에서 열리는 '섹슈얼리 이노센트 김중만: 1975'도 사진작가 김중만씨의 열정 어린 젊은 날을 짐작하게 하는 전시회다. 스물두 살 청년 김중만의 방랑과 자유와 사랑이 담긴 흑백 사진 50여 점이 나왔다. 김씨의 초기 작업이 국내에 처음 공개되는 자리다.

사진은 내밀한 에로티시즘의 향기를 머금고 있다. 성(性)은 작가의 눈 속에서 터져나오지 않고 고인다. 젊음을 상징하는 성은 자연과 어우러져 하나의 심리 상태를 이룬다. 김중만에게 성은 자유의 다른 이름이었던 모양이다. 사진평론가 이기명씨는 "성적 자율성을 추구하는 주체적인 인간, 김중만이 꿈꾸는 에로스의 세계는 바로 자유다"라고 평했다. 김중만씨가 '아프리카' 연작에서 야생 동물의 세계를 집요하게 찍고 있는 원형이 여기 젊은 날의 자유에 있는 것이다. 031-771-5454.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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