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중앙시평

베이비 부머들의 환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나라가 어수선하다. 미사일에, 한.미 FTA 협상에, 물난리까지. 그래도 한 나라를 대표한다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날로 거칠어지고, 그 와중에 패 가르기 댓글들이 난무한다. 하지만 어쩌겠나. 그게 이 나라의 현실이고 우린 그 현실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것을. 결국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할 사람들은 우리 자신뿐이다.

어제 정부가 흥미있는 통계를 냈다. 서울과 6대 광역시에 사는 1955~63년생(베이비 붐 세대)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더니 이 중 56.3%(매우 17.5%, 어느 정도 38.8%)가 은퇴하면 농촌에 살고 싶다고 응답했다는 거다. 그래서 농림부는 앞으로 7년 안에 수도권을 제외한 전국 각지에 300개의 전원마을 조성을 지원하겠다는 게 골자다.

은퇴 후 농촌으로 가서는 뭘 할 건가. 이주 희망을 밝힌 사람들 중 78.1%가 '소일하면서 전원생활을 즐기고 싶다'고 답했다. 도시생활의 팍팍함에 얼마나 지쳤으면 적잖은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농촌으로 가고 싶다 했을까.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나라 살림이건 개인 살림이건 문제는 돈이다. 은퇴 후 월평균 지출액도 조사 항목에 들어 있다. 47.9%가 100만~199만원, 31.6%가 200만~299만원쯤 들 거라고 밝혔다. 얼추 잡아 월 200만원 정도를 생각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 거꾸로 따져보자. 베이비 붐 세대들은 우리 나이로 44~52세다. 이 나이가 참 애매모호하다. 우선 아이들이 한창 학교에 다닐 시기다. 아다시피 한국의 교육비-특히 사교육비-는 가위 살인적이다. 모은 돈 허는 것은 물론, 대출도 마다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을 떠나 현실이 그렇다. 또 하나, 상상 이상의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고령화를 몸으로 느끼는 세대다. 본인 스스로가 그렇고 위 세대에 대한 부담 또한 그렇다. 스스로를 생각하면 미래를 위한 여축을 치열하게 해야 할 시기지만 지출 구조가 그렇게 돌아가질 않는다. 그렇다면 더 버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다시피 '사오정'이란 말이 예사롭게 들린 지도 벌써 한참됐다. 이른바 '철밥통' 빼고는 다들 자리 걱정할 나이다. 물론 국민연금이 있다. 45세의 직장인이라 칠 때 현 제도에서 받을 돈은 높게 잡아 100만원이다. 이 또한 금액 축소, 지급 개시 연령 상향이 불가피하다. 또 하나 기댈 곳은 이자나 배당소득이다. 배당이야 보통사람에겐 있는지도 모를 돈이고, 문제는 이자인데 이게 답이 잘 안 나온다. 요즘 정기예금 이자로 볼 때 월 100만원을 마련하려면 3억원 정도는 있어야 한다. 집 장만하고, 애들 교육시키고, 시집.장가 보내야 하고, 뭔가 숨이 차다. 내친김에 하나 더 생각해 보자. 유산이다. 이거야 천차만별이고 우리나라엔 관련 통계도 없으니까 미국 자료를 원용해 보자. 우선 미국인의 86%는 상속은 아예 기대를 않고 있고, 굳이 평균적인 상속금액을 따져보면 2004년 기준 2만9000달러 정도다. 우리 돈으로 3000만원에 약간 못 미친다. 이나마 고령화와 이에 따른 의료비 지출 부담으로 줄고 있는 추세다. 우린들 다를 게 없다. 답답하지만 다 따져봐도 은퇴 후 월 200만원이 결코 쉽지 않다.

그래도 뭔가는 해야 할 것 아닌가. 우선 이런 문제에 대한 스스로의 절실한 인식이 필요하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깨고 사소하게 보이는 금융수익의 차이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집을 포함한 자산의 효율적 운용, 창업.재취업 등의 미래설계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모든 품을 팔아야 한다. 아울러 자식에 대한 과잉투자-교육이건 결혼이건, 또는 상속이건-를 재고하고, 자신의 노후관리에 훨씬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고령화 사회에서 가장 큰 노후대책은 취업기간의 연장이라는 데 대한 사회적 합의다. 평균수명 60대 때의 정년제도가 초고령화 사회가 코앞에 닥친 지금까지 존속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이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고령화의 사회적 부담은 더욱 커지고, 결국 다른 어딘가로 전가될 수밖에 없다. 일정 연령에서 임금 삭감을 전제로 한 정년 연장 같은 문제를 차일피일하는 이 나라 노사정(勞使政)의 행태가 안타까운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박태욱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