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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좌수영 주민들이 보호에 앞장|관리소홀로 사적·유물 훼손|성역화추진 시민운동 활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전라남도 여수시를 중심한 옛좌수영지의 주민들이 좌수영일대의 숱한 사적·유물들을 스스로 지키자며 발벗고 나섰다. 주민들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구국혼이 깃든 사적·유물들이 당국의 무관심 속에 날로 그 원형을 잃어가자 최근 「좌수영 성역화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관계기관에 사적복원·보수대책을 세워줄 것등을 호소하고 있다.

<성역화추진>
여수시와 여천시·여천군등 이른바 좌수영 옛터 3개시·군 주민들이 좌수영 성역화추진위원회를 구성한 것은 지난해 9월1일.
정채호위원장(40·고려상호신용금고대표) 등 20여명의 위원으로 발족한 이 위원회는 좌수영의 구국혼을 우리 스스로 기리고 빛내기위해 올해4월5일에는 향토사학가들을초치, 좌수영 성역화 심포지엄을 개최했으며 좌수영을 알릴 교육요원 75명을 양성하는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있다.
이 위원회는 헌종때 국가에서 발간한 『호남좌수영지』를 번역, 출간할 예정이며 갈수록 잊혀져가고 있는 사적지에 해설표지판도 세워나갈 계획이다.
또 이 위원회는 충무공과 좌수영에 관한 잘못된 교과서내용을 수정하는 운동도 전개하고 국가적 차원에서 충무공의 제사를 여수에 유치하자는 운동도 벌일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문정인 상임부위원장(53·여수문화원장)은 『왜란이후 65년동안 임금의 명에 의해 충무공 제사는 여수 충민사에서 모셔왔다』면서 충민사등 좌수영사적·유물들을 이같이 방치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역사 인식에서 비롯된 푸대접으로 참역사에 대한 모독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여수시의 한 관계자는『좌수영의 아까운 사적과 유물들이 정화사업비가 없어 제대로 손을 못써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면서 『국가적 차원에서의 성역과 대책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관리소홀>
좌수영은 페영후 1백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일제에 의해 거의 철저하게 파괴되고 그나마 남은 사적·유물들도 관리소홀속에 훼손 또는 마멸돼 이제는 충무공을 비롯한 수많은 유·무명 애국선현들의 기개로 위풍당당했을 당시의 자취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
조선조 성종16년(1485년)3월 착공, 5년7개월에 걸친 대역사끝에 축성된 것으로 전해지는 좌수영성(둘레3천6백34척·높이13척)은 흔적도 없이 허물어졌으며 망남관등도 날로 마멸, 퇴락해가고 있다.
여수 구항(구항) 을 내려다보는 시가지 중심부에 있는 진남관(여수시군자동472) 의 경우 제4대 3도수군통제사겸 전라좌수사인 이시언장군이 선조31년12월(1598년)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진해사터에 지은 거대한 객사(객사).
조선 수군총사령부격인 3도수군통제영의 위용을 상징하던 진남관은 숙종42년(1716년) 소실됐으나 2년뒤 이제면수사가 중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리나라 목조 단일건물중 최대규모인 진남관은 68개의 아름드리 둥근 기둥이 특히 눈길을 끄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객사로 총건평 2백40경의 매머드 건물.
여수하면 진남관을 연상할만큼 좌수영 옛터의 상징적건축물인 진남관은 좌수영 페영후 여수공립보통학교등으로 사용되는등 사실상 관리 무방비 상태 속에 방치돼 오다 76년부터 이른바 성역화를 위해 정화·보수사업이 시작됐다.
여수 주민들의 기대를 모았던 진남관 정화사업은 인색한 국고지원 속에 지지부진, 14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정화에 필요한 주변부지 1천여평을 사들이지 못한채 진척이 거의 없는 상태다.
진남관정화사업에 그동안 투입된 사업비는 총13억원에 이르고 있으나 국비지원은 1억3천만원에 그친데다 그나마 85년 기둥 17개가 썩어 보강공사를 할때 6백만원을 지원한후 아예 지원을 않고 있다.
여수시는 92년까지 망해루(건평36평 규모)를 복원하는등 진남관 정화사업을 마무리지을 계획이나 건물 정면 왼쪽 보호구역에 들어서 있는 31채의 주택등 각종건물 보상비만도 2O여억원이나 돼 빈약한 시 재정 형편상 사업비를 마련하기 어려워 애태우고있다.
충민사(여수시덕충동 1829) 는 선조34년(1601년) 영의정 이항복의 제청으로 통제사 이시언장군에 의해 건립된 충무공 최초·최고의 사당.
이순신장군이 선조34년(1598년) 음력11월19일(양력12월16일) 관음포앞 해전에서 왜적의 흉탄에 맞아 54세를 일기로 서거한후 충무공을 기리는 국가적 기념사업 제1호로 건립된 이 사액사당은 충남 아산 현충사보다 1백3년이나 앞서 세워진 의미깊은 충무공 사적이다.
여수 마래산 기슭에 있는 이 사당은 여수권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보태는등 정화사업에 앞장서 75년부터 사당 신축등 정화를 위한 본격공사가 시작됐으나 사업비확보가 어려워 지난해부터는 공사마저 중단된채 국고지원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여수시가 98년까지 10억여원을 들여 끝낼 계획으로 있는 정화사업도 대폭적인 국고지원 없이는 실현불가능한 형편이다.
이량수사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연산군3년(1497년) 여수 앞바다 협수로 1백여m에 쌓았다는 국내 유일의 수중성 장군성도 거의 유실됐으며 광해군7년(1615년) 충무공의 공훈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통제리공수군대첩비」(보물제571호)도 이곳저곳으로 옮겨지다 현재 여수시고소동 등성이 12평의 허름한 비각 안에 초라하게 서있는 실정.
또 충무공이 거북선을 조선한 곳으로 널리 알려진 여천 선소도 발굴및 정화사업이 중도에서 멈춰 있으며 의인전술의 유물인 석인, 수군의 야간조련에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석주화대등 귀중한 유물·사적들이 없어지거나 훼슨되고 있다.

<전라좌수영>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 즉 전라좌수영이 전남 제1의 미항(미항) 이자국제개항장인 항도 여수에 설치된 것은 조선조 성종10년(1479년).
조선 수군의 대표적인 전략기지로 당시 순천부여수면내례포인 여수반도에 설치된 좌수영은 왜적의 노략질과 임진·정유왜란이라는 누란지세의 국난을 극복한 구국의 터전으로 민족사에 영원히 남을 역사의 현장으로 평가되고 있다.
좌수영은 초대 박거겸수사에서 마지막 김철사수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3백4명의 수사가 거치는 동안 호국의 보루로 4백17년간 그 역할을 다해오다 일제에 의해 고종 32년7월(1895년)페영됐다.
이순신장군이 종6품 정읍현감에서 정3품 당상관인 전라좌수사에 발탁, 기용된 것은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년2개월전인 선조24년(1591년).
제81대 수사로 추정되는 충무공은 그 유명한 백의종군기간(1597년2월∼8월)을 합쳐 7년9개월간 전라좌수사겸 3도수군통제사를 역임, 이곳에 애국혼을 심고 수많은 사적·유물등 발자취를 남겼다.

<주변 사적·유물>
조선수군의 총사령본부격으로 양대 왜란을 승전으로 이끈 좌수영 옛터에는 3도통제영으로서의 위엄을 상징하던 객사 진남관(보물 제324호) 을 비롯, 충무공 최초·최고의 사당인 충민사(전남도지방문화재기념물 제11호)와 전라좌수영 수군대첩비(보물제571호), 이량장군 방왜축제비, 거북선 선소(선소)등 귀중한 사적과 유물이 많다.
이밖에도 조선시대 수군진(수군진) 축성의 계기가 된 전라좌수영성과 국내 한곳뿐인 수중성(수중성) 으로 알려진 장군성, 고소대, 화랑산성, 고악산성, 배봉연대, 수누비등 충무공과 좌수영에 얽힌 문화재가 수두룩하다. 그중에서도 진남관과 충민사, 수군대첩비, 장군성등이 그 역사성과 가치성등으로 대표적인 문화재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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