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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사람없으면 공중도덕 무시|이대로 좋은가(11)|운전수칙 지키면 바보취급|관중속에 숨어서 빈병던져|지하문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A건설 안모과장(37) 은 얼마전 입사 10년만에 첫 유럽출장을 나갔다가 사소한 교통신호위반으로 톡톡한 망신을 당해야 했다.
프랑스에서였다. 이국향취에 흠삑 젖어 거리를 거닐던 안과장이 빨간불 켜진 어느 횡단보도 앞에 이르른 것은 자정도 훨씬 지난 밤늦은 시각.
마침 통행차량도 드문드문하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 서울에서의 평소 버릇처럼 그대로 길을 건넌 것이 화근이었다.

<무단횡단 망신살>
「××× ×××....」 갑자기 앞을 가로막은 장대같이 키큰 서양남자 둘이 안과장을 향해 신호등을 가리키며 무어라 떠들어대는 것이 아무래도 자신의 신호위반을 나무라는 눈치였다.
말도 안통해 한참을 쩔쩔매며 『아임 소리』 만을 연발하던 안과장은 어디서 왔느냐는 영어질문에 얼떨결에『저패니스』라고 얼버무리고는 도망치듯 그자리를 빠져나왔다.
안과장은 그 사건이후 밥먹듯이 교통신호를 어겨온 습관을 고치게 되었노라며 멋적어했다.
미국인 로버트 브라운씨(43)는 자칭 지한인사. 5년째 서울에 살고있는 브라운씨는 그러나 한국인의 공중의식 이야기만 나오면 눈살을 찌푸린다.
그는 유흥업소 주변이나 주택가의 으슥한 곳으로 접어들면 경고인지, 낙서인지 모르게 쓰여진「소변금지」넉자를 어김없이 보게되고 가끔씩 가위표시 그림앞에서도 태연히 일을 보는 사람들과 맞닥뜨릴 때엔 실소를 터뜨리지 않을수 없다고 털어놓았다.
안과장의 망신스런 무단휭단이나 브라운씨가 목격한 노상방뇨등은 민주사회의 초석을 이루는 공중질서·공동규범들이 아무도 보는 사람이없는 곳에서는 얼마나 무참히 짓밟히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실례들이다.
남이 보는 앞에서는 체면이나 명분을 유지하기 위해 곧잘 지키던 규칙도 남이 보지 않거나 혼자 있을 때엔 무시하기 십상인 것이 오늘의 세태다.

<죄의식 전혀없어>
이와는 정반대로 많은 군중 틈속에 파묻히면 그 익명성을 이용, 규칙이나 질서를 예사로 어기고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지난5월 삼성-빙그레의 프로야구경기가 열린 대전구장의 관중소란도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다.
『아이쿠.』1루 코처스박스에 서있던 삼성의 천보성코치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정신을 잃고 말았다.
9회초, 홈팀인 빙그레의 패색이 짙어지자 일부 관중들이 마구 던진 빈병에 뒤통수를 얻어맞고 기절했던 것.
천코치는 관중들의 이같은 폭력행위를 「야구를 사랑하는 관중들이 잠시 흥분한 탓」 으로 돌렸다.
그러나 이 소란은 군증속의 익명성에 파묻혀 저지르면 자신의 행동은 쉽사리 드러나지 않으리라는 얄팍한 계산아래 관중들 스스로 지켜야할 규칙, 즉 관중매너를 망각한데서 비롯된 것임을 쉽게 짐작할수 있다.
은밀히 행해지는 이 지하문화적 성격의 질서파괴·규칙위반행위등은 올림픽 개최국이며 세계 10대 무역국인 국가의 시민의식을 의심케하는 행동들이다.
질서는 편리한 것이다. 규칙이 준수되는 사회에서는 상대방의 행동을 예측할수 있고, 이에따라 나의 행동 또한 계획할수 있기 때문이다.
규칙이 자율적으로 준수되지 않으면 타율적인 규제가 뒤따른다. 따라서 규칙은 스스로 지켜야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교통규칙만큼 가장 빈번히, 또 대수롭지않게 위반되는 것도 없다는 지적이다.
과속, 급정거, 안전거리 미확보, 갑작스런 끼어들기, 아무 곳에서나 마구 세워놓아 차량소통을 방해하는 불법주·정차 등등….

<3대중 1대위반>
지난달 22일 서울시경이 발표한 7월1일부터 20일까지의 교통법규 위반단속 건수는 총 25만6천건으로 이는 서울시내 차적 3대중 1대꼴이었다.
방학중 모국을 찾은 교포학생들도 서울의 가장 추악한 모습으로 교통 무질서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회사원 이모씨(3O)는 『운전수칙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 오히려 바보취급을 당하는 세상』 이라며 우리의 비뚤어진 교통문화를 꼬집는다.
이처럼 규칙이나 질서를 예사로 무시하는 행동·사고방식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것은 어릴 적부터 획일적인 교육만 받아 자율의 싹이 자라나지못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대학의 자율화가 정착되지못하고 있는 이유중의 하나도 정치·사회등 학교밖의문제 이외에 자율교육을 제대로 받지못한 「어른」 학생들의 자율능력 부족탓이라는 것이다.
때마다 모대학 도서관앞에 나붙는 도서 미반납자 명단도 「어른」 학생들의 자율의식결여와 무관하지 않다.
룰의 외반은 위반 자체도 문제지만 그보다 죄의식의 결여에 더 큰 문제가 있다.
『이판사판이죠. 어차피 잡힐몸인데 강도짓 한두번 더한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지난해 12월 서울강동경찰서 형사계.

<재수없으면 잡혀>
현장검증도중 달아나 강도·강간등 네차례의 범행을 더 저지르고 8일만에 붙잡힌강도범 홍모씨 (23·전과6범).『드라이버 1개면 웬만한 집은 다 내집이나 마찬가지죠. 어쩌다 재수없으면 잡히기도하지만… 』 그의 태연한 모습 어디에서도 사회질서 파괴에 대한죄의식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수 없다.
죄과에 대한 반성보다 이처럼 「재수없다」고 치부하는곳에서 깨진 법질서의 회복은 좀처럼 기대하기 어렵다.
『가정이나 사회 모두 명령 일률적인 권위주의 가치관이 지배해 자율의식이 성장하지못했습니디. 특히 오랫동안 일방통행적이었던 통치논리는 국민에게 사회의 룰을 「우리가 만든 약속」 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서울대김철수교수 (법학) 의 진단이다.

<내스스로 지켜야>
김교수는 지시 일변도 교육에서 하루빨리 탈피, 사회의 이견과 대립이 토론에 의해 조정되도록 꾸준한 자율훈련을 쌓는 것만이 민주사회를 앞당길수 있다고 강조한다.
민주주의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완성된 물건이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가꾸어가는 생활원리이기 때문이다.
민주사회의 토대를 이루는 규칙준수·질서존중등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율의식은 남보다 내 스스로 먼저 실천에 옮길때 그만큼 빨리 정착시킬수 있을 것이다. <유상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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