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통주학살」은 "일군조작극"|현장목격자 최형진옹 52년만에 진상밝혀|유언비어 퍼뜨려 조선·중국인 이간질|"일간첩·중동조자"로 동포들 이중참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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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중일 전쟁중 가장 잔혹했던 통주(하북생)학살사건은 한국인과 중국인을 이간질하기 위한 일본군계략에 의해 저질러진 참극으로 그 피해자는 중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바로 우리 동포들이었습니다.』 37년 7월29일 3백여명이 중일 양측에 의해 학살당한 통주사건당시 16세의 니이로 현장을 목격한 최형진씨(68·대구시신천동480)가 그동안 잘못 알려진 사건내막을 바로잡기위해 52년만에 입을 열었다.
이사건은 당시 요미우리(독매)·아사히(조일)신문등 일본언론을 통해「중국인들의 폭동」으로 기록되어있고 지금까지도 가장많은 피해자는 중국인들로 알려져있다.
최씨는『나라를 잃은 설움을 딛고 살아보려고 찾아간 우리동포들이 일본군 계략에 말린 「중국인자치공안요원」들에게 일본군스파이로, 일본군에게는 중국인동조자로 각각 몰려 2증으로 참변을 당하는것을 보고 치를 떨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최씨가 중일전쟁을 피해 북경서 1백여리 떨어진 통주로 간 것은 전쟁이 일어난지 18일째인 37년7월 22일.
평북이 고향인 최씨는 학업을 계속하기위해 천율에있는 삼촌에게 가있다가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난을 피해 통주로 간것이다.
당시 최씨와 함께 통주로 긔신한 사람들은 일본인 30여명과 그들에게 고용된 한국인 70여명.
통주에는 이들이 가기 이전부터 이미 우리동포 50여가구가 중국인 가명을쓰며 살고 있었다.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킨후 중국대륙점령지마다 만주국이라는 괴뢰정권을 만들어 치안을 유지하도록하고 만주곳곳에 흩어져 일본요인 암살과 군사기밀을 극비리에 입수, 서서히 세력을 키울 움직임을 보이는 조선독립운동가들을 눈의 가시처럼 생각하기 시작하던때였다.
이때문에 일본인들은 조선인과 중국인이 손을 잡아 세력을 형성할것을 우려, 이들 양쪽을 이간시키는데 혈안이 됐었다.
제남을 비릇한 산동생·하북생등 중국곳곳에서 일본은 유언비어를 퍼뜨려 중국인·조선인들끼리 반목하게하고 양민을 학살하기에 이른것도 이같은 이유때문이었다.
통주에서도 이간질조짐이 나타나 중국인 두명만모여도 『일본군이 장개석군에 의해 전멸뵀다』『일본군이 들어오면 일본에 협력한 조선인들은 모두 처형당할것』이라는등의 소문이 나돌았다.
천율시립초급중학2년생인 최씨가 통주로 온지 1주일만인 7월29일밤 드디어 학살의 막이 올랐다.
자정무렵 칠흑같은 어둠속에 자치 공안요원 30여명이 일본군단골여관·식당은 물론 우리동포 주거지역으로 몰려다니며 닥치는대로 일본인·조선인들을 처형하기 시작했다.
『까오리펑즈 (고려방자) 나오라.』 죽창·쇠스랑등으로 중국인들은 조선인을 일본스파이로 몰아 무참히 살육했다. 이른바 「중국인폭동」이 일어난것이다.
최씨는 현장을 탈출, 일본군 수비대에 이사실을 알렸고 긴급출동한 수비대가 통주마을에 갔을때는 피살자 97명가운데 우리동포 부녀자가 67명이나 희생당한 뒤였다.
「폭동주모자 색출」구실을 내세운 일본군은 「중국인박멸작전」을 개시, 2백여명의 중국인을 체포했다. 이들중에는 중국인 가명을 쓰며 중국인 행세를한 조선인 40여명이 끼어있었다.
우리동포들은 자신들이 조선인임을 밝혔지만 일본군인들은 이들을 제일먼저 처형했다.
『중일전쟁수행에 장애가 되는 조선인을 제거하자는 자신들의 계략이 틀림없다』고 최씨 는주장했다.
「중국인 폭동」을 신고한 공로로 중국어 통역으로 일본군을 따라다닌 최씨는 이후 여러차례 이같은 광경을 목격, 43년12월 더 이상 일본에 협조할수없어 일본군을 탈출했다.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것』 이라며 최씨는 당시의 참혹한 광경에 요즘도 몸서리칠때가 많다고 했다.【대구-이용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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