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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고성산업」의 교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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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영국이란 참으로 묘한 나라다. 산업혁명을 남먼저 일으키고 자본주의의 가장 악랄한 착취행위를 자행했으면서도 큰 혼란없이 산업·민주화 사회로 옮겨갔다.
자본주의이론의 원조라 할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 을 쓴 나라인가 하면 공산주의의 원조인 카를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쓴 나라이기도 하다.
찰스 디킨스가 그의 소설에서 자세하게 묘사하고있는 19세기의 영국사회는 오늘의 감각으로 볼때 이러고도 어떻게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나 의아해할만큼 빈부·상하 신분의 격차가 비참하기 짝이 없다.
그러면서도 정작 국부론의 신봉자와 자본론의 신봉자들은 영국안에서는 피를 흘리며 투쟁하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다.
영국은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1789년에는 물론 혁명의 열기가 유럽대륙을 휩쓸고 아시아로까지 번져온 1차대전 전후의 엄청난 혼란기에도 유독 평온한 사회를 유지해온 나라다. 혁명의 씨앗은 모두 이 나라에서 발아했는데도 정작 혁명의 열병은 이 나라를 비켜갔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역사학자들은 여러가지 이유를 찾아내겠지만 무엇보다도 이념이나 이즘을 자유로운 사고를 속박하는 굴레로 여기면서 모든 사회문제를 현실속에서 풀어나가는 실용주의적 국민성속에서 찾을수 있지않나 생각된다.
그래서 프랑스인들로부터 영국인들은 「철학이 없는 민족」이란 핀잔을 받기도 하지만 옆나라가 「사상」에 압도되어 혁명과 정변의 열병을 앓고있을때 영국은 비슷한 사회조건을 안고 있으면서도 안정된 진화를 해올수 있었던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영국인들의 그같은 특성을 보여주는 여러 예중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이른바 「고성산업」이라는 형식의 귀족계층 변신과정이다.
영국에는 지금도 귀족들의 옛권력과 영화를 상징하는 고성들이 곳곳에 산재해있다. 그러나 왕실소유의 고성을 제외하고는 이들 대부분이 귀족들의 독점적 소유를 떠났다.
시민들이 바스티유감옥에 쳐들어가고 베르사유궁을 점거하는것과 같은 과격한 혁명을 거치지 않고도 「합법적」으로 귀족들은 시민들에게 그들 특권의 상징을 양도했던 것이다. 그 비결은 오랜 세월에 걸친 재산세, 양도세의 누증과 유지비의 급증이었다.
1894년에 제정된 재산세법에따라 국세청은 그때까지 감히 손을 대지못했던 귀족들의 방대한 장원과 그 속에 왕궁처럼 호화롭게 지어놓은 고성들에 대해 재산세와 상속세를 물리기 시작했다.
그때는 이미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지방귀족들의 치부수단이던 농업은 쇠 퇴하고 도시 중심의 공업과 상업이 경제의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 변화속에서 귀족들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유지해온 특권의 상징인 장원과 고성을 계속 지킬 여력이 없었다.
처음에는 땅의 일부를 팔아 세금을 냈지만 상속세율이 높아지면서 그대로 가다가는 장원과 성채를 모조리 팔아도 상속세를 낼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45년 2차대전이 끝나고 노동당이 집권하면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47년 데번셔백작이 사망했을 때 그의 상속자가 낸 세율은 토지공시가의 80%에 이르렀다는 극단적 예가 있다.
이렇게 되자 귀족들은 대대로 이어받은 장원을 아예 국가 소유로 기증하거나 장원 자체를 거대한 시민의 놀이터로 만들어 돈벌이에 나서거나 양자택일하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처칠경의 생가로서 여왕이 살고있는 버킹검궁보다 거대한 블레님궁이 국가에 소유권을 넘긴 대표적 예다. 처칠가의 종손은 지금 그 거대한 궁전을 일반시민들에게 공개하는 대가로 자신들은 한쪽 구석의 조그만 거처에서 살고 있다.
고성을 거대한 동물원으로 개조해서 거기서 나오는 수익으로 이를 유지하고 있는 대표적 예는 베드퍼드백작 소유의 워번 에비궁이다. 이 고성은 장원을 아예 거대한 동물원으로 꾸며 놓고 고성내부에는 가보로 물려받은 도자기·그림·보석등을 진열한 박물관으로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현재의 주인인 타비스토크자작은 한술 더 떠서 단체 관광객이 올때면 고성안의 거대한 식당에 음식까지 차려놓고 「귀족과 함께 하는 만찬」 을 돈을 받고 제공하고 있다. 이런 귀족들의 변신을 놓고「고성산업」이란 이름이 생겼다.
이처럼 영국에 있는 수백개의 고성들은 이제 시민들의 입장료 덕분으로 유지될수 밖에 없는, 실질적인 시민 소유로 환원되어 있다.
필자가 이들 고성을 방문하면서 갖게된 호기심은 귀족들이 아직도 떵떵거리고있던 시대의 의회가 어떻게 귀족의 몰락을 가져올것이 뻔한 세법을 통과시켰느냐는 점이다. 물론저항은 있었겠지만 대다수 귀족들은 최근 우리나라 경제각료가 한인터뷰에서 밝혔듯이 『개혁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혁명이 온다』 는 절박한 변화의 필요에 순응한 결과였던 것이다.
남의 나라 이야기가 곧 우리 현실에 적용될수는 없겠지만 폭력을 거치지않고 한 지배계급이 스스로의 이익을 일부 포기함으로써 남들이 다 겪는 혁명의 열풍을 예방하고 산업화 사회로의 변혁에 수반되는 갈등과 진통을 소화시킨 모델로서 영국의 「고성산업」은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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