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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난 '윤석열 선배' 윤웅걸 "물고기는 칼을 먹고 산란한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7일 오후 집무실에서 윤웅걸(53·연수원 21기) 전주지검장이 사직 이유 등을 설명하고 있다. 김준희 기자

17일 오후 집무실에서 윤웅걸(53·연수원 21기) 전주지검장이 사직 이유 등을 설명하고 있다. 김준희 기자

17일 오후 집무실에서 만난 윤웅걸(53·사법연수원 21기) 전주지검장의 표정은 의외로 밝았다. 이날 윤 지검장은 사의를 표명했다. 1995년 창원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한 지 24년 만이다.

[단독 인터뷰] 사의 밝힌 전주지검장 #“작년 11월 검찰개혁론 쓸 때 떠날 결심” #퇴임사서 정호승 시 ‘부드러운 칼’ 인용 #“배고픈 물고기들이 칼 먹고 산란하듯 #검찰권이 국가·사회 살리는 칼로 쓰이길”

그는 윤석열(59·23기) 차기 검찰총장의 연수원 두 기수 선배다. 윤 지검장은 이날 검찰 내부 통신망인 이프로스에 ‘검찰을 떠나며’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고 사퇴 의사를 밝혔다. 퇴임식은 오는 24일이다.

윤 지검장은 윤 총장에 대해 “개인적 역량은 뛰어난 분”이라고 평가했다. 다만 정부가 문무일 총장보다 다섯 기수 아래인 그를 차기 총장으로 지명한 것에 대해서는 “사법권을 행사하는 검사에 대한 인사권 행사는 검찰의 정치적 독립성과 중립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신중하게 행사돼야 한다”며 에둘러 비판했다.

그는 지난해 11월과 지난달 두 차례에 걸쳐 검찰 내부망에 올린 ‘검찰개혁론’을 통해 “검사는 객관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직접 수사 대신 수사 지휘에 집중함으로써 ‘팔 없는 머리’로 돌아가자”고 주장한 바 있다. 그는 이날 올린 A4 3장 분량의 사직 인사에서 검찰개혁론 취지에 공감한 후배 검사가 보내준 정호승의 시 ‘부드러운 칼’을 인용했다.

윤 지검장은 “부드러운 칼을 먹고 물고기가 산란하듯, 추상과 같은 칼의 속성은 간직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애정은 잃지 않음으로써 부디 국민의 신뢰와 사랑을 받는 검찰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고 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홀가분한 표정이다.
“승진이나 (검찰에) 남아 있는 것에 욕심이 있었다면 마음이 무거웠을 텐데 내려놓으니 맘이 편하다.”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검찰을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는.
“지난해 11월 ‘검찰개혁론’을 처음 쓸 때부터 검찰을 떠날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검찰 개혁은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검찰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서는 글에 진정성을 담을 수 없었다. 다음 인사 때가 되면 사직서를 쓰려고 했다.”

-상의한 사람이 있나.
“혼자서 결정했다. 누가 ‘나가라, 마라’ 하지 않았다.”

-청와대나 윤석열 총장 등한테서 사퇴 압박은 없었나.
“그런 건 전혀 없다. 내 발로 걸어나가는 거다.”

-윤 총장을 어떻게 보나.
“개인적 역량은 뛰어난 분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총장직을) 잘할 거라 본다. 다만 그간 보여줬던 강단 있는 모습을 계속 보여줘야 국가와 검찰을 위하는 길이 될 거다.”

윤석열 신임 검찰총장. [연합뉴스]

윤석열 신임 검찰총장. [연합뉴스]

-정부가 문무일 총장보다 다섯 기수 아래인 윤 총장(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을 차기 총장으로 지명했는데.
“일반적으로 어떤 조직을 개혁할 때 인적 쇄신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런데 사법권을 행사하는 검사에 대한 인사권 행사는 검찰의 정치적 독립성과 중립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신중하게 행사돼야 한다.”

-‘검찰개혁론 1, 2’를 통해 현 정부가 추진하는 검찰 개혁을 비판했다. 주장의 핵심이 뭔가.
“검찰의 정치적 중립이라는 검찰 개혁의 본질은 권력과 검찰의 관계에 있는 것이지, 검찰과 경찰의 관계에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정부가 개혁의 본질을 애써 외면한 채 독일과 프랑스, 일본 등 대륙법계 국가의 제도도 아니고, 영국과 미국 등 영미법계의 제도도 아닌 중국식 검·경 관계를 그대로 모방하는 내용을 개혁 방향으로 제시한 것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검·경 밥그릇 싸움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밥그릇 싸움이 아니다. 검찰 권한을 지키고, 강화하는 게 아니다. 검찰 개혁 논의에서 제일 고려해야 할 것은 시민의 자유와 인권이 고도로 보장되느냐 여부다. 선진국들의 제도와 비교·분석해 우리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가장 잘 보장할 수 있는 제도를 채택해야 한다. ‘검찰에 유리(불리)하냐, 경찰에 유리(불리)하냐’가 기준이 돼선 안 된다.”

-검찰을 제대로 개혁하려면.
“검사가 객관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직접 수사를 줄여야 한다. 대신 인권 침해를 줄이고 범죄 척결의 효율성을 도모할 수 있는 수사 지휘에 집중하고 이를 강화하는 게 진정한 개혁 방향이다.”

-검찰 권한과 직접 수사를 줄이는 구체적 방안이 있나.
“검사들이 직접 수사의 유혹에 빠지는 요인은 검사 작성 조서에 증거 능력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선진 외국에서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 우리나라도 글로벌 스탠더드(세계 기준)에 맞춰 검사 작성 조서의 증거 능력을 폐지함으로써 검사들이 직접 수사를 꺼리게 만드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검찰의 직접 수사를 완전히 없앨 수 있겠나.
“검찰의 직접 수사를 최소화하더라도 경찰이 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권력형 비리 수사 등 불가피하게 검찰이 직접 수사를 하게 되는 경우에는 검사 수사에 대해서도 지금보다 더 강력한 통제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직접 수사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 모호한데.

“검찰의 자체 첩보에 의한 기획 수사나 권력의 하명 수사 등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검찰 내 ‘공안통’으로 불렸다. 앞으로 공안부가 없어지고 ‘공공수사부’로 명칭이 바뀌는데.
“시대가 변하면 명칭도 바뀔 수 있다. 특수부 검사들이 부패를 척결하고, 형사부와 강력부 검사들이 민생을 보호해 왔다면, 공안 검사들은 헌법 가치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해 왔다. 명칭이 변하더라도 국가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검찰의 기능은 계속돼야 한다.”(※윤 지검장은 수원지검 공안부장과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장·2차장 등 공안 분야 요직을 모두 거쳤다. 2015년 검사장으로 승진해 대검 기획조정부장과 제주지검장을 지내고 지난해 6월 전주에 부임했다.)

-사직 인사가 인상적이다. 직접 썼나.
“한 달쯤 됐다. 계속 고쳤다.”

-어떤 내용을 담고 싶었나.
“우리나라는 정치·경제·사회 등 각종 문제를 수사로 해결하는 ‘수사 만능주의’가 심각하다. 그 과정에서 검사들의 피의 사실 공표, (피의자) 포토라인 세우기, 끝없는 별건 수사, 가혹한 압수수색 등이 반복됐다. 떠나는 마당에 후배들에게는 절제된 검찰권 행사를, 각 분야에는 수사가 아닌 자율적인 해결을 바라는 마음에서 썼다.”

-사직 인사에 첨부한 정호승의 시 ‘부드러운 칼’이 회자된다.
“지난해 11월 검찰 내부망에 ‘검찰개혁론’을 올리고 후배 검사가 ‘공감한다. 글 뜻에 맞는 시가 있다’며 정호승의 시를 보내줬다. 읽자마자 ‘이 시는 퇴직할 때 인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고기들이 칼을 먹고 산란한다’는 마지막 구절이 맘에 들었다. 물고기가 산란하듯이 검찰권이라는 칼이 국가와 사회를 살리는 데 쓰이길 바란다.”

-퇴직 후 계획은. 출마하나.
“정치에는 관심 없다. 공직이라는 무게감은 참 대단했다. 그 짐을 벗고 그동안 가족들(아내와 2남1녀)에게 소홀했는데, 어떻게 하면 가족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지 힘쓰면서 살고 싶다. 변호사 개업 여부는 차차 알아보겠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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