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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하다] 법정으로 간 학폭위···열 중 넷은 뒤집어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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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2016년 당시 서울의 A중학교 1학년생이었던 이지원(가명)양은 같은 반 박정은(가명)양에게 1학기 때부터 계속 괴롭힘을 당했다. 박양은 교실·복도·운동장은 물론 SNS에서도 이양을 못살게 굴었다. 학교는 12월이 돼서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됐고,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를 열어 박양에게 출석정지 10일의 징계를 내렸다.

길 잃은 학폭위, 이대로 괜찮은가 <하> #학폭위원 대부분이 비전문가 #절차상 하자 등 빈틈 많은 탓 #교사가 조사·서류·회의 도맡아 #절차 완벽하게 지키기엔 역부족 #툭하면 학폭위 … 징계 남발 지적도

하지만 박양이 징계를 무효로 해달라고 낸 소송에서 법원은 박양의 손을 들어줬다. 박양의 행동이 학폭인지 아닌지는 따지지도 않았다. 애초에 징계를 의결한 학폭위가 구성부터 잘못됐다는 이유였다.

학교폭력예방법에 따라 학폭위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학부모위원은 학부모전체회의에서 직접 선출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도 학폭위원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자 A중은 학부모회 임원들이 모이는 회의에서 임의로 학부모위원들을 위촉했다. 재판부는 “의결의 주체에 중대한 하자가 있으니 징계 자체가 무효”라고 판시했다.

학폭 징계, 열중 넷은 재판서 뒤집힌다 

서울 서초구 서울행정법원·서울가정법원 건물에 대한민국법원을 상징하는 로고가 붙어 있다. [뉴스1]

서울 서초구 서울행정법원·서울가정법원 건물에 대한민국법원을 상징하는 로고가 붙어 있다. [뉴스1]

‘탐사하다 by 중앙일보’가 대법원이 최근 1년 간 공개한 학교폭력 관련 판결문 138건을 분석한 결과 박양의 사례처럼 가해학생이 징계 취소나 징계 무효 확인을 청구하며 제기한 소송 116건 중 승소한 경우는 47건이었다. 비율로 보면 40.5%로, 법원까지 온 징계 처분 열 건 중 네 건이 뒤집어진 셈이다.

법원이 가해학생의 손을 들어준 47건의 사유를 살펴봤다. 사유를 복수로 든 경우엔 각각 별건으로 집계했다. 박양 사건처럼 학폭위 구성이나 운영 과정에 문제가 있는 ‘절차적 하자’가 23건으로 가장 많았다. A중학교처럼 학부모위원 위촉 과정이 위법하거나 학폭위 소집 과정에서 가해 학생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아 방어권을 침해했다는 이유 등이 대부분이었다.

행정 절차에 허덕이는 학폭 교사들

실제 학폭 담당 교사들의 가장 큰 애로사항이 행정 절차 문제다. 사안을 조사하고 학폭위 회의를 소집·의결하는 것만 해도 벅찬데 그 과정에서 준비해야 할 서류가 워낙 많아 완벽하게 절차를 지키는 일이 쉽지 않다.

서울 종로구의 한 고교에서 학폭 담당을 맡고 있는 정모 교사는 “학폭 사건이 터지면 교사는 경찰·수사관·판사·행정사의 역할을 동시에 해야 하는데 교과 수업과 병행하면서 이를 완벽하게 처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며 “아무리 학폭 담당이라 해도 교사는 법조인이 아니기 때문에 소송까지 갈 경우 경험과 정보가 월등한 변호사들에게 당할 수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법원에서 학폭위 결정이 뒤집힌 또 다른 사유로는 가해학생이 한 행위가 학폭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처분사유 부존재’가 17건, 학폭에 해당하지만 처분이 너무 가혹하다는 ‘학교장의 재량권 일탈·남용’이 10건이었다. 발생한 사건에 비해 과도한 징계를 내렸거나 학폭에 해당하지 않는데도 징계 결정을 내리는 등 학폭위 운영상의 문제가 판결문을 통해 드러난 셈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전문성 없는 학폭위

이같은 문제는 학폭위원 대부분이 학폭 분야의 비전문가라는 점에 기인한다. 학폭위원 중 절반 이상은 평범한 학부모들이고, 학폭위원장을 맡는 교감과 학폭 담당 교사 역시 관련 전문가로 보기 힘든 일반 교사일 뿐이다. 이러다 보니 객관성도 문제가 될 소지가 생긴다.

지난해 1년 간 학부모위원을 지낸 김모씨는 “왕따 사건으로 학폭위에 소집됐는데 가해학생 어머니와 친한 사이였다. 그 어머니는 나한테 ‘억울하니 사정 좀 잘 봐달라’고 하고 다른 학폭위원들에게도 밥사고 선물을 돌렸는데, 솔직히 그러다 보니 심리적으로 그 쪽 편을 들게 되더라”고 털어놨다. 김씨는 이어 “아이들 말이 다르다 보니, 정확한 사실관계도 모른 채 판단을 강요받는 느낌도 들고, 감으로 결정을 내린다는 생각도 한 적이 있다”며 “무엇보다 아이가 고3 인데 신경 쓸 일이 많다 보니 학폭위에 점점 소홀하게 되더라. 작년에만 7번이나 열렸는데 처음보다는 점점 대충 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고 전했다.

일선 교사들도 학교라는 공간의 특수성과 학폭 담당 교사에게 강제 수사권이 없다는 점 때문에 조사과정에 빈틈이 생길 수 밖에 없다고 토로한다. 학폭이 발생했을 경우 학폭 담당 교사는 가해·피해 학생에 대한 면담을 토대로 사안을 조사하는데, 학생들이 면담에 응하지 않을 경우엔 이를 강제할 방법이 현재로선 전무하다. 한 학폭 담당 교사는 “학폭에 연루된 학생들에 대한 조사와 면담은 쉬는 시간과 종례 이후 시간을 활용해야 한다”며 “쉬는 시간에 불러 조금 조사하다보면 수업이 시작되고, 수업을 마친 뒤에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원에 가야 한다는 이유로 면담을 기피하기 때문에 ‘사안조사’와 관련한 어려움이 가장 크다”고 말했다.

학폭

일부 학폭 담당 교사들이 경미한 사안에도 ‘면피성 학폭위 소집’을 남발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학교측이 자체 중재를 통해 학폭위 없이 사안을 종결할 경우 자칫 학폭을 축소·은폐하려 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어서다. 현행 교육공무원 징계 규칙에 따르면 학교에서 학교폭력을 은폐할 경우 학교장 및 관련 교원은 4대 비위(금품수수, 성적조작, 성폭력범죄, 신체적 폭력)에 준한 징계를 받는다.

탐사보도팀=유지혜·정진우·하준호 기자 ha.junho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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