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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하다]학폭 1건에 서류 20건···교사들 "수업 준비는 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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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7월 1일(월)
1학년 교실에서 싸움이 났다. 쉬는 시간에 소란이 일어 뛰어가 보니 범식이(가명)가 바닥에 넘어져 코피를 흘리고 있고, 성주(가명)는 씩씩대며 서 있었다. 교장 선생님은 곧장 학폭위(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 소집을 지시했다. 학폭 접수대장 기재, 교육청 보고 문서 작성, 성주·범식이 어머니와 통화까지 하고 나니 밤 9시. 내일 수업은 준비도 못 했다.

길 잃은 학폭위, 이대로 괜찮은가 <상> #재량권 적고 잘못 처리하면 징계 #초임·기간제 교사에 떠넘기기도

#7월 2일(화)
범식이부터 불러 어찌 된 일인지 물었다. 가만히 있는데 성주가 갑자기 달려들어 때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내일은 성주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다.

#7월 5일(금)
성주가 계속 면담을 피한다. 그제는 과외, 어제·오늘은 학원 보충수업이 있다며 종례가 끝나자마자 사라졌다. 학폭 조사는 수업 외 시간에만 가능하다는 걸 아이들도 잘 안다. 2주 안에는 무조건 학폭위를 열어야 하는데, 마음이 급하다.

#7월 8일(월)
쉬는 시간마다 성주를 불러 겨우 이야기를 다 들었다. 범식이가 먼저 “멍청하다”고 욕을 해서 화가 났다고 했다. 역시 서로 말이 다르다. 아이들은 궁지에 몰리면 본인 잘못은 축소하곤 한다.

#7월 9일(화)
상황을 목격한 명준이(가명)를 불러 물었다. 범식이가 뭐라고 한 뒤에 성주가 달려들긴 했는데 정확히 듣진 못했다고 한다. 학폭 사건에서 법정 드라마처럼 실체적 진실을 파악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나는 선생님이지 수사관이 아니지 않은가.

#7월 10일(수)
학부모 학폭위원 선출이 큰일이다. 우선 학급 대표부터 정해야 하는데, 주말부터 계속 전화를 돌렸지만 여의치가 않다.

#7월 12일(금)
학폭위가 열려 성주에게 교내 봉사 처분을 의결했다. 이제 회의 속기록과 양쪽에 보낼 결과 통지서를 만들고, 교육청에 올릴 보고서를 써야 한다. 이번 주말도 특근이다. 그런데 진짜 수업 준비는 언제 하지….

서울의 중·고등학교에서 학폭 사안을 담당하는 교사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교사일지 형식으로 재구성한 학폭위 소집 과정이다. 학폭 담당 교사들은 “학폭위로 행정 소요가 늘어나면서 학교가 병들고 있다”고 토로한다.

“교사가 경찰인가” 학폭 교사 고충

학폭 1건을 처리하는 데 필요한 서류는 약 20여 건. 학폭위 처분에 불복해 재심과 법정 싸움으로 이어지면 서류 업무는 더 불어난다. ‘탐사하다 by 중앙일보’가 입수한 ‘생활교육 담당 교사들 모임’ 단체대화방(참여자 1475명)은 이런 어려움을 호소하는 내용으로 빼곡하다.

‘학급일보다 학폭 처리에 집중할 수밖에 없어 우리 반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하네요.’

‘이게 교육을 하라는 건지? 노가다를 하라는 건지? 정말 살인적인 업무입니다.’

‘학폭위 업무에 떠밀려 아이들 자습시키는 교사가 되고 싶진 않네요.’

전국 초·중 ·고 학폭 담당 교사 1400여명이 참여한 카카오톡 단체채팅방. 한 교사는 학폭위 소집과 관련한 행정 업무로 인해 정작 수업 준비에 소홀해질 수 밖에 없다는 불만을 제기했다. [정진우 기자]

전국 초·중 ·고 학폭 담당 교사 1400여명이 참여한 카카오톡 단체채팅방. 한 교사는 학폭위 소집과 관련한 행정 업무로 인해 정작 수업 준비에 소홀해질 수 밖에 없다는 불만을 제기했다. [정진우 기자]

전국 초·중 ·고 학폭 담당 교사 1400여명이 참여한 카카오톡 단체채팅방. 한 교사는 학폭위 소집과 관련한 행정 업무로 인해 정작 수업 준비에 소홀해질 수 밖에 없다는 불만을 제기했다. [정진우 기자]

전국 초·중 ·고 학폭 담당 교사 1400여명이 참여한 카카오톡 단체채팅방. 한 교사는 학폭위 소집과 관련한 행정 업무로 인해 정작 수업 준비에 소홀해질 수 밖에 없다는 불만을 제기했다. [정진우 기자]


학폭으로 인정하는 범위가 계속 확장되면서 교사들이 다루는 학폭 사안은 점점 다양해지는데, 화해·중재를 시도할 수 있는 재량권은 오히려 더 줄었다. 관련 학생·학부모가 은폐나 축소 의혹을 제기하면 징계 사유도 될 수 있다.

또 학폭 조사는 대개 관련 학생들의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교사에게는 증거 수집을 강제할 수 있는 권한도 없다. 인천 남동구의 한 중학교 학생안전부장 A교사는 “아이들 말만으로 가해·피해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학부모들은 학교에서 아무리 객관적으로 조사했다고 해도 대개 그 결과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다.

“학교 못 믿어” 학부모 불신, 민원 폭주로

학부모의 불신은 민원으로 이어진다. 서울 방학중에서 생활안전부장을 맡은 조광희 교사는 “학부모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는 ‘선생님이 뭘 아느냐’다. 밤늦은 시간에 문자를 보내거나, 언론에 제보한다고 으름장을 놓는 경우도 있다”고 털어놨다. 인천 만수북중 박정현 교사는 “재심 청구뿐 아니라 청와대 국민청원, 국가인권위원회 등에 동시다발로 민원을 제기해 학생지도 교사가 스트레스로 앓아누워 명예퇴직하는 일도 있었다”며 “교육과 선도를 위한 ‘관용의 정신’이 지금은 법적인 ‘직무유기’로 치부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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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지도가 기피 업무가 되다 보니 초임 교사나 1~2년 단위로 바뀌는 기간제 교사가 학폭 업무를 떠맡는 경우도 많다. 익명을 원한 한 학생지도 담당 교사는 “지금처럼 ‘돌려막기’가 아니라 학폭 전담 교사를 길러 학폭 사안 처리의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탐사보도팀=유지혜·정진우·하준호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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