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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테르테 정권, 마약 잡으려 청부살해 동원”…국제앰네스티 의혹 제기

중앙일보

입력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지난해 4월 수도 마닐라에서 열린 경찰 행사에 참석해 저격용 총기를 들고 있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지난해 4월 수도 마닐라에서 열린 경찰 행사에 참석해 저격용 총기를 들고 있는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불법 마약사범은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지만 정부가 공권력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과도한 사상자가 발생했다면 이를 정당한 법 집행으로 볼 수 있을까. 정부가 무장단체를 매수해 마약사범에 대한 '청부살해'까지 벌였다는 의혹이 나온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현재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정권에서 불거진 의혹이다.

8일(현지시간) 인권감시단체인 국제앰네스티는 홈페이지에 성명을 내고 두테르테 정부의 비인간적인 마약사범 소탕 작전을 고발했다. 국제앰네스티는 성명에서 "두테르테 정부의 살인적인 마약퇴치 운동이 사회를 파괴하고 있다"며 "유엔은 '마약과의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필리핀의 인권유린 범죄를 즉각 조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 지난달 필리핀 정부는 마약사범 소탕 작전 중 사살된 마약 용의자 수가 6600여명이라고 공인했다. 약 36개월 전인 2016년 6월 두테르테 대통령이 취임하고 마약과의 전쟁이 시작됐으니 매월 18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온 꼴이다. 그러나 국제앰네스티는 두테르테 정부가 각종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 '마약사범 사냥'을 벌이고 있어 사망자 수는 정부 발표보다 많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필리핀 당국의 마약 소탕작전으로 사망한 이들의 유가족들이 지난 3월 17일 마닐라의 한 교회에서 추도식을 열고 있다.[AP=연합]

필리핀 당국의 마약 소탕작전으로 사망한 이들의 유가족들이 지난 3월 17일 마닐라의 한 교회에서 추도식을 열고 있다.[AP=연합]

국제앰네스티는 지난해 5월부터 올해 4월까지 약 11개월 동안 두테르테 정부의 비인간적인 마약사범 소탕 작전을 조사했다. 사망자 27명이 나온 각기 다른 마약 관련 사건 20건을 분석하고 피해자 가족과 목격자 57명의 인터뷰를 곁들였다. 국제앰네스티는 두테르테 정부가 '청부살해' 등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 마약사범 사냥을 벌이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국제앰네스티가 폭로한 두테르테 정부의 인권유린 실상은 상상 이상이다. 마약사범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이들이 비슷한 패턴으로 죽음에 이르렀다는 점이 핵심 의혹이다. 미리 준비된 '틀'처럼 비슷한 사살 사례가 반복됐다는 것이다. 마약 용의자 실종사건이 발생하고 만약 실종자가 사체로 발견되면 별안간 총기 소지와 마약 혐의가 덧씌워지며 마약 수사 과정에서 사살된 사건으로 포장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찰의 사살 사례 중에는 주변인 진술과 배치되는 경우도 드러났다. 조반 메그타농(30)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11월 필리핀 경찰 발표에 따르면 메그타농은 경찰의 마약 수사 과정에서 사살됐다. 현장에선 마약이 든 봉투와 총기가 함께 발견됐다. 그러나 국제앰네스티가 확보한 목격자 진술은 다르다. 메그타농은 세 아이를 가진 아버지로, 사살 당시 아이들과 집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고 한다. 메그타농의 가족들은 지난 1년여 동안 그가 마약을 복용하지 않았으며 총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두테르테 정부가 경찰은 물론 경찰과 돈으로 연결된 무장단체를 이용해 마약사범 사냥에 나서고 있다는 의혹도 나온다. 마약 관련 혐의로 사살된 용의자를 조사한 경험이 있는 필리핀의 한 법의학 전문가는 국제앰네스티와의 인터뷰에서 "(마약 사살 사건들은) 매우 일관된 각본처럼 보이며, 보고서를 보면 사실상 정해진 틀과 다른 게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증언했다.

국제앰네스티는 "'마약과의 전쟁'으로 자행되고 있는 인권유린에 대한 유엔 인권이사회의 즉각적이고 독립적인 조사가 필요하다"며 "국제형사재판소도 철저한 수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오원석 기자 oh.won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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