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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기는 죄가 없다" 홍보 황제 나이키, 홍보 헛발질한 사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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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신세] #별 13개 스니커즈 팔지도 않고 회수한 사연

나이키가 선보이려다 돌연 철회한 ‘에어 맥스원(Air Max 1) USA’의 광고 이미지. 성조기의 소위 ‘오리지널 버전’인 베치로스기(betsy ross flag)를 뒤꿈치에 수놓았다. [사진 나이키]

나이키가 선보이려다 돌연 철회한 ‘에어 맥스원(Air Max 1) USA’의 광고 이미지. 성조기의 소위 ‘오리지널 버전’인 베치로스기(betsy ross flag)를 뒤꿈치에 수놓았다. [사진 나이키]

이젠 구하려 해도 구할 수 없는 ‘희귀템’ 나이키 운동화입니다. 얼마 전 스탁엑스(StockX)라는 유명브랜드 리셀링 쇼핑몰에선 켤레당 1000달러(약 117만원)에 거래되기도 했다는군요. 셀럽(유명인사)이 신어서 품절된 걸까요. 실은 일반 소비자에게 공식적으로 선보이지도 않은 제품입니다. 매장에 깔리기도 전에 나이키가 전량 회수했거든요.

이 제품의 이름은 ‘에어 맥스원(Air Max 1) USA’. 약 15년 전에 나왔던 상품의 신상 버전이죠. 당시엔 50개의 별이 박힌 현대 성조기가 발뒤꿈치에 새겨져 있던 반면 이번엔 소위 ‘오리지널 성조기’로 불리는 베치 로스기(betsy ross flag)가 박혔다는 게 새로운 점입니다. 베치 로스기는 미국 독립선언(1776년) 당시 13개주를 뜻하는 13개의 별이 특징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13개의 별 때문에 나이키는 제품 출시 철회를 결정했습니다. 운동화 제조·홍보는 물론, 거둬들이고 폐기하는 비용까지 고스란히 손실이 됐습니다. 그뿐 아니라 새로 짓기로 한 제조공장 부지도 다시 물색해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로 치면 대한제국 시절 태극기를 활용한 디자인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요. [고 보면 모 있는 기한 계뉴스-알쓸신세]에서 마케팅의 황제 나이키가 헛발질하다 불 지핀 '애국주의(Patriotism)' 논란을 짚어봅니다.

"노예제 시절 연상" "역사 폄하하는 주장"  

“그 회사(나이키)의 부끄러운 후퇴다. 미국 기업은 우리나라(미국) 역사를 자랑스러워해야지 저버려선 안 된다.”

공화당 소속의 더그 듀시 애리조나주 주지사가 지난 2일(현지시간) 트위터에 올린 글입니다. 듀시 주지사는 나이키가 베치 로스기 디자인의 운동화를 판매 중지하기로 한 사실이 알려지자 이 같은 비판 트윗을 연속으로 올렸습니다. “우리나라 독립 주간에 미국 역사를 축복하긴커녕 나이키는 베치 로스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정치적 올바름과 역사 수정주의의 공습에 굴복했다” 등입니다.

지난 6월 14일(현지시간) 미국 국기 제정의 날(Flag Day)을 맞아 필라델피아의 베치 로스 기념관에서 베치 로스기가 게양되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6월 14일(현지시간) 미국 국기 제정의 날(Flag Day)을 맞아 필라델피아의 베치 로스 기념관에서 베치 로스기가 게양되고 있다. [AP=연합뉴스]

앞서 나이키는 배포한 제품을 거둬들이면서 홈페이지에 “해당 제품을 판매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만 알렸습니다. 하지만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일 그 배경을 보도했습니다. 옛 성조기에 박힌 13개의 별이 "노예제 시절과의 연관성을 드러내는 모욕적인 상징"이라는 항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베치 로스기를 일부 극우 백인우월주의 단체가 전용하고 있기 때문에 부적절한 디자인이라고 문제 삼았답니다.

그러자 공화당 소속의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텍사스)과 미치 매코넬 상원 원내대표 등 정치인과 일부 네티즌들은 나이키의 결정에 반감을 표했습니다. 나아가 듀시 주지사는 "오늘 나이키 애리조나주 공장 설립에 지원 예정이던 인센티브를 모두 철회할 것을 지시했다"고 밝혔습니다. WSJ에 따르면 나이키는 애리조나 공장에 1억8500만달러를 투자해 최소 500명을 고용할 예정이었습니다. 애리조나주는 인센티브 차원에서 100만 달러 비용을 면제해주기로 했었고요. 이 '윈윈'이 물거품이 된 겁니다. 듀시 주지사는 “우리나라 역사를 의식적으로 폄하하는 기업들에 아첨할 필요가 없다”고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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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키로선 제품은 제품대로 손실 보고 새로 짓기로 한 공장은 옮겨야 할 판국에다 '역사를 폄하하는 기업'이라는 이미지까지 덧쓰게 된 꼴입니다. 이같은 역풍에 부담을 느꼈는지 2일 나이키는 공식 성명을 통해 “미국의 유산에 대해 자랑스러워 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이번 결정은 국가의 애국적인 휴일(독립기념일)에 의도치 않게 불쾌감을 주고 훼방할까 하는 우려에서 나왔다”고 덧붙였습니다. 미국 올림픽과 축구 대표팀 등 수천 명을 후원하고 있으며 국내외적으로 3만5000명을 고용하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한마디로 '우린 애국 기업'이란 겁니다.

'무릎꿇기 논란' 주인공 캐퍼닉 조언이 결정적 

사실 이번 논란이 커진 건 나이키의 철회 결정을 이끌어낸 '배후 인물' 때문입니다. 콜린 캐퍼닉(32). NFL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49ers) 쿼터백을 뛰었던 흑인 선수죠. WSJ 보도에 따르면 나이키 측에 베치 로스기 운동화 철회를 요구했던 대표 인물이 캐퍼닉이라는군요.

"자, 일이 어떻게 돼가는지 알겠다. 콜린 캐퍼닉이 좋아하지 않으면, 미국에서 더는 뭔 일이 생기지도 않겠군." 흑인 자수성가 기업인이자 친트럼프 인사로 유명한 허먼 케인이 비꼬듯이 쓴 트윗입니다. 캐퍼닉의 문제제기를 삐딱하게 보는 보수파의 시각이 뚜렷이 드러납니다.

왜 캐퍼닉이 문제일까요. 알려진 대로 그는 한동안 NFL을 뒤흔든 '무릎꿇기 캠페인'의 원조입니다. 경찰 총격으로 흑인이 잇따라 사망하는 등 인종차별 이슈가 들끓던 2016년 8월, 캐퍼닉은 경기 중 국가(國歌)를 제창할 때 서서 경의를 표하는 대신 한쪽 무릎을 꿇고 앉는 퍼포먼스를 벌였습니다. NFL에서 그를 따르는 선수들이 늘면서 지지와 비난 여론이 극심하게 갈렸습니다.

지지자는 캐퍼닉의 행위를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이자 자유의지의 표현으로 이해했습니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같은 이는 “스포츠팬들은 자신의 나라와 국가(國歌)에 자부심을 표하지 않는 선수들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며 맹비난했습니다. 구단주들이 애국심 없는 선수를 해고하거나 출전시키지 말아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캐퍼닉은 포티나이너스와 계약이 종료된 2017년 이후 실직 상태가 됐습니다.

지난해 나이키가 전 NFL선수 콜린 캐퍼닉을 모델로 기용해 선보인 대형 옥외광고. [AP=연합뉴스]

지난해 나이키가 전 NFL선수 콜린 캐퍼닉을 모델로 기용해 선보인 대형 옥외광고. [AP=연합뉴스]

사람들이 그를 잊어갈 무렵. 지난해 나이키는 ‘저스트 두 잇’ 캠페인 30주년 기념 광고 모델로 캐퍼닉을 기용해 논란을 재점화했습니다. NFL 은퇴 후 인권운동가로 변신한 캐퍼닉 얼굴이 대형 옥외광고로 시내 곳곳에 내걸렸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이키가 캐퍼닉을 모델로 쓴 것은) 끔찍한 메시지"라고 맹공을 퍼부었습니다. #나이키보이콧' '#나이키를태워라' 등의 해시태그가 소셜미디어를 덮었고 실제로 나이키 운동화를 불태우거나, 나이키 양말을 찢어버리는 식의 동영상이 속속 올라왔습니다.

'반항·다양성’ 젊은 소비자 호응에 매출 껑충

말하자면 캐퍼닉은 트럼프 대통령이 내세우는 '미국 우선주의' 혹은 국가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입니다. 어두운 인종차별의 역사를 청산하긴커녕 재생산하는 모국을 향해 "이게 나라냐"하고 삐딱선을 타는 아웃사이더. 그런 그를 영웅시한 나이키 광고에 맞서 불매운동이 요란했습니다.

그런데 반전이 있습니다. 문제의 광고 열흘 만에 나이키 매출이 광고 전 열흘에 비해 61% 증가한 겁니다. 주가도 잠시 주춤했다가 다시 회복세를 탔고요. 여론조사에서 18~34세 응답자의 44%가 나이키의 광고 모델 선정을 지지한다고 밝혔답니다. “도전적이고 반항적인 태도로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한 게 적중했다”는 평가가 뒤따랐습니다.

사실 이 같은 광고는 나이키의 오랜 특기죠. 1988년 팔순 노인의 달리기를 조명하는 '저스트 두 잇'을 시작으로, 나이키는 사회 통념에서 한발짝 앞서는 광고로 논란과 화제를 불러왔습니다. 최근엔 '겨드랑이털 드러내는 여성' '플러스 사이즈 마네킹' 등으로 '젠더 이슈'를 앞서가고 있고요. 캐퍼닉 기용 역시 1972년 창립한 나이키가 '젊은 이미지'를 유지하는 회심의 캐스팅으로 보입니다.

나이키가 '겨드랑이 털' 노출 논란을 불러일으킨 광고 사진. [사진 나이키우먼 인스타그램]

나이키가 '겨드랑이 털' 노출 논란을 불러일으킨 광고 사진. [사진 나이키우먼 인스타그램]

이번 소동은 나이키가 현대 성조기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려다 역풍을 맞은 거로 보입니다. 사실 성조기만큼 예술·상품으로 자유롭게 변형돼 사랑받아온 국기도 드물잖아요. 나이키의 이번 시도 역시 '애국'보다는 '재미'에 방점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캐퍼닉이라는 인물의 상징성 때문에라도 그의 지적을 외면할 수 없었고 그게 다시 애국주의논란으로 번진 거지요. 논란에도 침묵하던 캐퍼닉은 4일 트위터에 유명한 도망노예 출신의 노예해방론자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말을 인용하며 '누구를 위한 독립 기념일이냐'는 식의 '삐딱선'을 다시 드러냈습니다.

어쨌든 나이키는 '개인주의' '다양성의 공존'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의 가치관을 고수한 셈입니다. 그래서 마케팅 전문가들은 이 정도 화제를 부르고 제품을 '손절'한 게 차라리 잘됐다고 보는 편입니다. 새 공장이야 다른 데 지을 수도 있으니까요. 실제로 듀시 주지사가 '나이키 퇴짜' 트윗을 날린 날, 민주당 소속인 뉴멕시코 주지사 미셸 루한 그리셤은 "헤이 나이키, 얘기 좀 할까요"라는 트윗으로 공장 유치 구애에 나섰습니다. 광고 논란이 벌어질 때마다 오히려 매출이 껑충 뛰곤 했던 나이키. 이번에도 전화위복이 될까요.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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