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남편 폭력 신고했더니 경찰 “도발하지 마세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5면

위기의 가족 범죄<상> 

어머니 등 일가족 3명을 살해하고 뉴질랜드로 도피했다가 국내로 송환된 김성관(37)이 지난해 1월 19일 용인동부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이후 김성관에겐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연합뉴스]

어머니 등 일가족 3명을 살해하고 뉴질랜드로 도피했다가 국내로 송환된 김성관(37)이 지난해 1월 19일 용인동부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이후 김성관에겐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연합뉴스]

“고소해도 벌금형이 될 확률이 높으니 도발하지 마세요.”

피해자 보호 외면하는 사회 #집안일로 여겨 처벌·대처 미지근 #폭력 25만 건 신고, 입건 4만건 뿐 #가정폭력 처벌 강화법 국회 계류 #“경찰 권한 강화, 보호시설 확충을”

지난 5월 가정폭력을 당해 신고한 K씨가 현장에 출동한 경찰에게 들은 말이다. 결혼 3년 차인 K씨는 신혼 때부터 가정폭력을 겪었다. 처음엔 집에 있는 물건을 부수던 남편은 곧 K씨에게 폭언과 폭력을 퍼부었다. 목덜미와 머리채를 잡혀 집 안을 질질 끌려다니는 수준으로 폭력이 심해졌을 때 K씨는 수화기를 들어 112를 눌렀다. 이후 K씨는 보호기관과의 상담에서 신고 당시 경찰 대처의 아쉬움을 털어놨다.

고유정의 전 남편 살인 등 가족 간 강력범죄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를 예방하기 위해선 가족 간 폭력, 아동학대와 같은 ‘전조 신호’를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1366 여성긴급전화에서 10년여간 활동한 관계자는 “베개로 숨통을 조르거나 흉기로 위협하는 등 협박은 증거를 제시하기 힘들다”며 “저항하다가 난 손톱자국 등을 찍어 쌍방폭행으로 맞고소당하는 피해자도 있다”고 설명했다. 가족 간 폭행, 방임 학대 등 범죄를 ‘집안일’로 여기는 문화도 문제로 지적됐다. P군(15)은 집안에서 투명인간이었다. 재혼한 아버지와 새엄마 사이에 동생이 태어나자 새엄마는 친자식인 동생만 챙겼다. 아빠가 퇴근해 저녁을 주지 않으면 온종일 한 끼도 먹지 못할 때도 있었다. 지난해 말 극단적인 시도를 한 P군을 돕기 위해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에서 P군의 아버지에게 연락했지만 “안 챙겨준 게 아니라 아이가 거부한 것이고, 집안 사정이다”며 “때리지도 않았는데 무슨 학대냐”는 답만 돌아왔다고 한다.

관련기사

경찰도 답답함을 토로한다. 가족 간 범죄는 보통 집에서 일어나는 만큼 폐쇄회로(CC)TV 등 증거를 확보하기 힘들다. 수사 과정에서 진술이 바뀌거나 가해자의 처벌을 원치 않는 경우도 빈번하다. 서울의 한 경찰은 “지난해 말 분노조절장애를 가진 엄마가 칼을 들고 아이를 훈육한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을 때 엄마가 무섭다던 아이가 엄마와 떨어지기 싫다고 진술을 바꿔 곤란했다”고 회상했다.

경찰청 가정폭력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가정폭력으로 112에 신고된 24만8660건 중 입건 처리된 건수는 4만1720건이다. 증거가 부족하거나 처벌을 원치 않는 등의 이유로 입건되지 않는 경우가 20만 건이 넘는다. 경찰 관계자는 “(가족 간 범죄) 신고를 받고 출동하면 70%가 폭행이고 15%는 협박인데 모두 반의사불벌죄”라며 “처벌을 원치 않으면 사건화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를 해결하고자 지난 3월 피해자 의사와 상관없이 가정폭력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아직 논의 중이다. 전문가들은 보호조치에 필요한 절차를 줄이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 관련 기관의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은구 경찰청 가정폭력대책계장은 “경찰의 긴급 임시조치는 효력이 48시간뿐이고 그 이상은 검찰과 법원의 허가가 필요한데, 결정까지 10일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며 “경찰이 먼저 조치한 뒤 법원 통제를 받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사법대학 교수는 “경찰이나 보호단체에서 격리 등을 하고 싶어도 보호시설이 충분치 않다면 대처하기 어려운 만큼 사회 인프라 확충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태윤·편광현 기자 lee.taeyu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