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최준호의 과학&미래

불 꺼지는 연구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최준호 기자 중앙일보 과학ㆍ미래 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최준호 과학&미래팀장

최준호 과학&미래팀장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 한국 과학기술 여명기의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는 최형섭 초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소장의 회고록 제목이다. 1966년 설립돼 한국 과학기술 관련 정부 출연연구원들의 모태가 된 KIST의 별명이기도 하다. 전력이 부족하던 시절, 연구에 몰두하느라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던 ‘희한한’ 연구소를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KIST를 비롯한 과기 출연연구원들은 그렇게 한국의 산업화와 근대화를 이끌었다.

그러던 출연연들에 불이 꺼지게 됐다. 다음달부터 본격 시작하는 주 52시간 근무제로 인한 변화다. 취지는 좋다. 무조건적인 성장과 높은 성과를 위해 앞만 보고 달렸던 과거와 달리, 일할 때는 집중하고, 휴식할 때는 쉬자는 뜻이다.

문제는 연구소 박사들에게도 이 제도가 적용된다는 점이다. 주 52시간제를 어기는 ‘연구 노동자’가 있을 경우 ‘사업주’(연구소장)가 징역 2년 이하 또는 2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당장 정부 출연연들이 모여있는 대전 대덕특구에서 난리가 났다. 기한을 정해 두고 한국형 발사체와 달 탐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항공우주연구원과 같은 곳은 더욱 그렇다. 그간 75t 로켓엔진과 시험용 발사체 개발을 앞두고 밥 먹듯 날밤을 지새웠던 항우연에 주 52시간 근무제는 넘기 힘든 산처럼 등장했다.

재량근무제라는 특례규정이 있긴 하다. 연구소 등 업무의 성격상 업무 지시보다 근로자 재량에 위임하는 것이 나은 사업장의 경우,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업무 수행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재량근무제는 노사합의를 통해 정해야 한다. 하지만 출연연 직원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재량근무제 도입을 우려한다. 휴일이나 밤늦게 연장 근무를 해도 수당으로 인정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전 출연연의 한 본부장은 “연구자들을 더 뽑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뾰족한 묘수가 없어 막막하다”고 하소연했다.

아. 그러고 보니 25개 과기 출연연 중 재량근무제를 무리 없이 도입한 곳이 하나 있다. 맏형 격이며 불이 꺼지지 않는 연구소라 불렸던 KIST가 그곳이다.

최준호 과학&미래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