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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소주성' 밀어붙이니 경기 하강···통계청 석연찮은 해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통계청이 17일 우리나라 경기가 언제 꼭짓점을 찍고 내려왔는지를 알 수 있는 ‘경기 정점’에 대한 판단을 보류했다. “경기 정점을 설정하기까지의 기간이 과거에 비해 짧고, 주요 지수의 변동 폭이 미미해 다시 논의가 필요하다”는 게 통계청이 밝힌 사유다. 그러나 강신욱 통계청장이 여러 차례 ‘2017년 2~3분기 즈음’을 경기 정점 시기로 언급한 점을 감안하면 석연찮은 구석이 많다.

이 때문에 통계청이 정치적 부담 때문에 결정을 미룬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학계에선 강 청장과 비슷하게 2017년 5월 또는 9월을 경기 정점으로 본다. 이때를 경기 정점으로 선언하면 그 직후부터 경기가 내림세로 돌아섰다는 의미가 된다. 공교롭게도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소득주도성장을 본격적으로 밀어붙인 시기다.

동행·선행지수 순환변동치.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동행·선행지수 순환변동치.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렇게 되면 현 정부가 당시 추진한 최저임금 인상, 법인세ㆍ소득세 최고 세율 인상, 주 52시간제 시행, 한국은행의 금리 인상 등에 대한 비판이 나올 수 있다. 정부가 실물경기 흐름을 잘못 읽고, 허약해진 경제에 부담을 주는 정책을 펼친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번 보류 결정은 이미 2017년 2~3분기를 정점으로 체감하는 시장의 인식과도 괴리가 있다. 당시 경기가 꼭짓점을 찍었다는 신호는 많다. 경기동행지수는 2017년 3∼5월과 2017년 9월 정점을 찍고 계속 내리막이다. 경제성장률도 2017년 3분기 1.5%를 기록한 후 꺽임세가 완연하다.

이날 회의에는 경제통계분과위원 12명 중 9명이 참석했는데 이 가운데 6명은 경기 정점 판정을 유보하자는 의견을 냈고, 3명은 경기 정점을 설정하자는 의견이었다고 참석자들은 전했다. 통계청장을 역임한 유경준 한국기술교육대 교수는 "논의 형식 자체가 정치적 판단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구조"라며 "특히 이번 경기 정점을 설정하는 것이 부담이 컸던 만큼, 유보 결정은 충분히 예견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사실 이런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4월 통계청은 예정에도 없이 ‘팔마비율’ 등 4개 소득분배지표를 새로 개발해 발표했다. “통계 이용자들의 수요를 반영했다”는 계 통계청의 설명이었지만 통계청의 업무 계획에도 없었던 지표가 뜬금없이 공개된 데다, 그 내용도 정치적으로 오해할 만한 소지가 다분했다.

이때 나온 팔마비율을 보면 2016년 1.45배에서 2017년 1.44배로 소득분배가 소폭 개선된 것으로 나왔다. 그럼에도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36개 회원국 가운데선 30위다. 요약하자면 새 정부 들어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소득불평등이 심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제적 불평등이 세계에서 가장 극심하다”는 문 대통령의 발언과 “이명박ㆍ박근혜 정부에서 소득불평등이 악화했다”는 홍남기 부총리의 발언을 뒷받침하기에 딱 맞는 통계였다.

지난해 9월에는 가계동향조사 방법을 다시 옛날 방식으로 돌리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2017년부터 분리했던 가계동향조사의 소득부문과 지출부문을 다시 합친다는 것이다. 당시 황수경 통계청장의 갑작스러운 경질 논란으로 이어진 최악의 소득 양극화 결과를 보여줬던 바로 그 통계다. “통계 정확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라는 게 통계청의 해명이었지만 시계열 분석이 중요한 통계를 2년도 안 돼 조사 방식을 바꾼다는 점에서 눈총이 쏟아졌다. 이런 구설이 계속 이어지다 보니 통계청을 흔드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끊이지 않는다.

사실 현 정부 들어 정부 코드에 맞는 유리한 경제지표만 골라내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이런 통계 ‘코드 해석’도 문제지만, 통계의 ‘코드 작성’은 이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위험이 될 수 있다. 국가 통계는 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중요한 토대이기 때문이다. 정치논리에 휘둘린 통계를 기반으로 잘못된 정책이 나오고, 이는 결국 나라 경제 전체를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다.

무엇보다 통계의 생명은 신뢰성이다. 지금처럼 국가 통계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된다면 통계에 대한 불신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우려가 크다. 선진국에서 통계청의 정치적 독립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은 박근혜 정부 초기인 2013년, 통계청장 임기를 4년으로 보장하는 통계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 바 있다. 지금 여당이 됐다고 당초 발의 취지를 잊었을 리 없다. 정부 스스로 통계청의 독립성ㆍ중립성 강화를 위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종=손해용 경제정책팀장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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