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선2035

다행과 불행 사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이가영
이가영 기자 중앙일보
이가영 사회팀 기자

이가영 사회팀 기자

덜컹, 덜컹, 쾅…. “꺅” “누구야!”

몇 해 전 친구들과 떠난 여행. 자정 넘은 시각 곤히 잠들었던 우리는 갑자기 펜션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라 깨어났다. 문을 연 건 다른 펜션에 놀러 왔던 중년 남성이었다. 비명을 지르는 우리의 모습에도 그는 의외로 침착했다. 펜션 안쪽을 살피던 남성과 현관문 사이로 눈이 마주쳤을 때 소름이 돋았다. 옆 펜션 여행객의 도움으로 이 남성은 현관을 넘어오지는 못했다. 경찰이 오자 남성은 “사람이 있는 줄 몰랐다. 다른 펜션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 열어봤다”고 말했다. 그 말을 믿기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거짓이라는 증거도 없었다. ‘다행히’ 우리는 놀라는 것 외에 다른 피해를 본 것이 없었고, 그에게는 건조물 침입 혐의가 적용됐다. 대부분 벌금형을 선고받는 죄명이다.

검찰 송치 후 형사조정 과정에서 만난 남성은 선심 쓰듯 “어차피 국가에 낼 거 너희에게 주겠다”며 20만원의 합의금을 제안했다. 물론 무죄 추정의 원칙은 지켜져야 하고 일어나지 않은 일을 예상해 죄를 묻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친구 중 한 명은 정신과 상담을 받을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변호사는 “여기서 합의하면 남성이 아예 재판에 넘겨지지 않을 수 있다”고 전했다. 당시엔 합의를 거부하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최근 논란이 된 ‘신림동 강간미수 사건’을 보면서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여성은 ‘다행히’ 문을 일찍 닫아 화를 면했고, 남성에게는 주거침입 혐의만 적용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경찰은 강간미수 혐의도 적용했다.

대법원도 나섰다. 내년 4월까지 주거침입죄에 대한 양형기준을 만들기로 했다. 법원은 “1인 가구가 증가하는 현실에서 주거침입범죄에 대한 국민 불안감이 크다”고 설명했다. 지금이라도 법원이 나선 것은 다행이다. 강력 범죄를 피한 ‘다행’이 가해자에 대한 약한 처벌로 이어지는 ‘불행’이 되는 일이 더는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가해자 제대로 벌주려면 내가 더 큰 피해를 봤어야 했나 봐”라고 자책하듯 얘기하던 친구의 목소리가 귀에 맴돈다.

이가영 사회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