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黨·政, 가업상속 공제 문턱 낮춘다…경영계, "실효세율 낮춰야"

중앙일보

입력

플라스틱 용기 제조업체 A사 김모(72) 사장은 요즘 고민이 많다. 40년 가까이 운영해 온 회사를 자식에게 물려줄 방법이 마땅치 않아서다. 마케팅을 전공한 장남은 유통업을 하고 싶어하지만, 업종을 바꾸면 가업(家業) 상속공제를 받을 수 없다. 막대한 세금을 내야 한다. 김 사장은 “자산을 매각해 증여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중소·중견기업인이 자녀에게 기업을 물려줄 때 세제혜택을 받는 ‘가업 상속공제’ 요건이 완화된다. 하지만 경제계는 여전히 사전·사후 요건이 까다롭고 실효세율 자체가 높아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가업상속 지원세제 개편방안 당정협의'에서 가업상속 공제요건을 완화하기로 했다. 하지만 경제계는 여전히 상속세의 실효세율이 높고, 요건이 까다롭다며 추가 완화를 요구한다. 왼쪽부터 더불어민주당 정성호 의원(기재위원장), 이인영 원내대표, 조정식 정책위의장, 홍남기 경제부총리. 변선구 기자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가업상속 지원세제 개편방안 당정협의'에서 가업상속 공제요건을 완화하기로 했다. 하지만 경제계는 여전히 상속세의 실효세율이 높고, 요건이 까다롭다며 추가 완화를 요구한다. 왼쪽부터 더불어민주당 정성호 의원(기재위원장), 이인영 원내대표, 조정식 정책위의장, 홍남기 경제부총리. 변선구 기자

정부·여당은 11일 당정협의를 갖고 가업상속공제 혜택을 받는 기업의 사후관리 기간을 단축하는 내용의 지원세제 개편방안 마련에 합의했다. 가업상속 공제는 매출 3000억원 미만 중소·중견기업을 10년 이상 경영한 뒤 자녀에게 물려줄 때 상속재산 가액에서 최대 500억원까지 공제해주는 제도다.

개편안에 따르면 가업상속 공제혜택을 받는 기업이 업종과 고용규모를 유지해야 하는 기간이 10년→7년으로 단축된다. 10년 간 기업자산의 20% 이상을 처분하지 못하게 하고 업종·고용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 가혹한 ‘족쇄’가 된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사후관리 기간 내 규제도 완화했다. 업종변경 허용범위를 현행 한국표준산업 분류상 소분류에서 중분류로 확대한다. 호텔업을 물려받은 상속인이 콘도업을 하거나 제분업을 상속받아 제빵업을 할 수 있게 하는 식이다.

자산유지 의무도 완화됐다. 개편안에선 업종 변경에 따른 대체자산을 취득할 때, 기존 자산 처분이 불가피할 때 등 예외범위가 넓어졌다. 관리기간 내 중견기업의 고용유지 의무도 상속 때 기준인원의 120%에서 100%로 완화됐다.

개편안은 또 가업상속 공제요건을 충족할 때 주는 ‘연부연납(年賦延納)’ 특례 대상을 기존 매출액 3000억원 미만 기업에서 전체 중소·중견기업으로 확대했다. 연부연납은 최장 20년에 걸쳐 법인세를 납부하게 한 제도다. 공제대상 기업 기준은 ‘매출 3000억원 미만’이 유지됐다. ‘부의 세습’에 대한 비판여론을 의식한 결과다.

◆경영계, ”미흡하다”=업종 유지 요건이 완화됐지만 김 사장의 경우처럼 자녀 대(代)에 업종을 바꾸려는 기업인은 가업상속 공제혜택을 받기 어렵다. 경제계에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일자리와 소득을 창출하는 한 기업활동을 이어갈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정의 발표 직후 경제계는 “아쉽다”“갈 길이 멀다”는 반응을 쏟아냈다. 가업상속 공제요건 완화를 주장해온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은 이날 “기업이 요구한 내용에 크게 미흡해 규제 완화 효과 자체를 체감하기 어려운 수준”이라며 “상속세 최고세율을 낮추고 최대주주 할증평가를 폐지하는 등 실질적인 효과를 낼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중소기업중앙회도 “사후관리 기간과 업종유지의무 완화는 환영하지만, 고용유지요건을 독일처럼 총급여 기준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하고 가업승계를 위한 증여세 과세특례 확대 등을 포함하지 않은 것은 아쉽다”고 밝혔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고용유지 요건에서 임금총액 기준을 선택하게 하는 내용이 빠졌고, 업종유지의무도 여전히 까다롭다”며 “기업승계 이후 신축성이 일부 넓어진 것은 긍정적이지만 선진국 수준에 미치지 못해 국회 논의 과정에서 더 전향적인 방향을 검토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높은 실효세율 개선해야=학계와 경제계는 다른 국가와 비교할 때 지나치게 높은 상속세의 ‘실효세율’을 낮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속세의 최고세율이 높은 데다 공제요건이 까다로워 가업상속 공제혜택을 받기가 어렵다는 주장이다.

경총이 지난달 28일 연 ‘상속세 개선 토론회’에서 이성봉 서울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한국의 상속세 실효세율은 다른 국가를 훨씬 웃돈다고 분석했다. 명목 최고세율은 일본 55%, 한국 50%, 독일 50%, 미국 40% 등이지만, 10억원을 상속받는다고 가정했을 때 평균 실효세율은 한국이 28.09%로 가장 높고 미국(23.86%), 독일(21.58%), 일본(12.95%) 등의 순이다.

이 교수는 “실제 공제가 이뤄지도록 혜택을 늘려 실효세율을 낮추지 않으면 작은 기업은 기업을 매각하는 게 낫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크고, 일감 몰아주기 등 규제를 받는 대기업은 사실상 승계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 빚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정구용 상장회사협의회 회장도 “사후관리기간 단축만으론 가업승계를 활성화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한국 기업상속의 가장 큰 문제는 노(老)-노(老)상속인데, 60대 아들이 80대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다른 경제활동을 하지 않을 리 없다”며 “독일이나 일본처럼 실효세율을 낮추고 증여세 과세특례 등을 확대해 미리 기업승계를 준비할 수 있게 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김용민 연세대 법무대학원 겸임교수는 “고용유지조건을 직원 수가 아니라 독일처럼 총급여 기준으로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며 “매년 최저임금이 오르고 자동화로 산업환경이 바뀌는데 7년이면 회사 문을 닫아야 할 판이 된다”고 말했다.

이동현·김정민 기자, 세종=김기환 기자 offram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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