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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안 될 추경안이 먼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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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추가경정 예산은 양날의 칼이다. 제대로 쓰면 경제 회복에 특효약이 될 수 있다. 반면에 나라 재정에는 큰 부담이다. 추경 편성 요건을 법으로 분명히 한정한 이유다. 국가재정법은 ▶전쟁이나 대규모 재해 ▶경기 침체, 남북 관계의 변화 같은 대내·외 여건에 중대한 변화 등에만 추경을 편성할 수 있도록 했다.

올 4월 정부가 내놓은 6조7000억원 규모의 추경안도 명분상으로는 이 법에 근거했다. 정부 표현으로는 ‘미세먼지를 해결하고 민생경제를 지원하기 위해’ 추경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정부의 말과 행동이 달라서다. ‘미세먼지 등 국민안전’(2조2000억원)보다 ‘민생’(4조5000억원) 분야가 더 큰 추경안을 내밀고도 “우리 경제는 성공으로 나아가고 있다”며 한사코 경기 침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정부다.

추경안 세부 내용은 또 어떤가. 제로페이 보급 76억원, ‘체육복지 향상에 기여할’ 국민체육센터 건립 163억원, 영화관·박물관·미술관 할인 지원 25억원 등이 들어 있다. 이것이 대체 경기 부양과 어떤 관계가 있나. 추경안에는 또 ‘96억원을 풀어 미세먼지 감시원 1000명을 뽑겠다’는 내용도 있다고 한다. 지난해 일자리 대책이라며 내세운 ‘대학 강의실 불 끄기 용역’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더 큰 걱정은 정책 실패를 수긍하지 않는 정부의 태도다. 성장잠재력을 갉아먹은 소득주도 성장과 친노조 정책을 그대로 끌고 나가겠다고 한다. 규제를 확 풀어 신성장 동력을 키우겠다는 의지 또한 찾아보기 힘들다. 이대로라면 3조6000억원 국채를 발행해 가며 추경을 집행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뿐이다.

사실 지금 한국 경제가 추경이 필요한 건 맞다. 공공 일자리를 만들어야 할 정도로 상황이 녹록지 않다. 정부도 몸이 달았는지 “경기 하강이 장기화할 소지가 있다. 추경이 조기 추진돼야 한다”고 했다. 어제 고위 당·정·청 회의 역시 추경의 시급함을 역설했다. 협조하지 않는 야당을 탓하기도 했다. 그러나 추경안이 50일 가까이 표류하는 현 상황은 정부·여당이 자초한 측면이 다분하다. 갑자기 침체를 호소하는 것에서부터 엉뚱한 추경 항목에 이르기까지 국민이 갸우뚱거리게만 만들었다. 지금이라도 정부와 여당은 진정 어린 해명을 해야 한다. 왜 그토록 경기 부진을 인정하지 않았는지 설명하고, 필요하면 사과·반성해야 한다. 제로페이 예산 등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점은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다. 야당을 탓하기 전에 국민이 동의할 방안을 내놓는 게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