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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제국' 미국은 어디로] 5. 외국인은 싫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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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달 7일 밤 미국 애리조나주의 툼스톤에서 남쪽으로 약 50km 떨어진 멕시코 국경. 사막 구릉지의 가시덤불 뒤쪽에서 대여섯개의 시커먼 그림자들이 세 시간째 꼼짝하지 않고 어둠 속의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군화에 위장복을 입고, 허리춤에는 권총을 찼지만 이들은 군인이 아니다. 인근 마을인 툼스톤.비스비.더글러스에 사는 백인 주민들로 이뤄진 '조국민간수호대'(Homeland Civil Defense) 대원들이다. 야음을 틈타 국경을 넘어오는 멕시코 밀입국자들을 잡아 국경수비대에 넘기는 일을 하고 있다. 무보수 자원봉사다.

매복작전에 동행한 취재진이 저려 오는 무릎을 펴면서 잠시 바스락댔다. 바로 옆 언덕 위에 엎드려 있던 한 대원이 살그머니 기어와 핀잔을 준다. "저들도 '척후병'을 보내 동정을 살핀 뒤에야 넘어온다. 사막에서는 사람 목소리가 1마일(1.6km)도 더 가고, 그믐달 밤에도 사람 윤곽선이 보인다. 제발 좀 조심해 달라."

매복은 자정을 넘겨 한시간 가량 더 지속되다 대장인 크리스 심콕스(42)의 철수명령에 따라 중단됐다.

현재 멕시코 국경에서 이들처럼 자발적 국경감시활동을 벌이는 민간 조직은 목장구조대.미국국경감시단 등 10여개. 모두 9.11 테러 이후 결성됐다. 지난 5월부터는 국경에서 멀리 떨어진 미주리주 주민들까지 단체를 조직해 야간투시경.서치라이트.망원렌즈.라이플까지 갖추고 애리조나로 '원정'을 오고 있다.

보수성향의 지역신문인 툼스톤 데일리 발행인인 심콕스 대장에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다.

"많은 미국인이 멕시코 불법이민자들에게 밀려 일자리를 잃고 있다. 이들은 세금 한푼 안 내면서 아이들을 공짜로 학교에 보낸다. 이대로 두면 미국은 이민자 때문에 망한다 …." 차가운 국경의 밤, 그의 열변은 그칠 줄 몰랐다.

이민자의 나라 미국이 달라지고 있다. 9.11 테러 이후 외국인에 대한 경계심과 반(反)이민 정서가 확산하면서 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 들어와 살고 있는 이민자에 대한 각종 차별과 규제가 대폭 강화되고 있다.

출신과 국적에 관계없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다인종 국가 미국의 경쟁력으로 승화시켜온 미국의 '멜팅 폿(melting pot.용광로)'이 식어가고 있는 것이다.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한국인 최모(46.직장인)씨는 9.11 이전 이민국에 영주권을 신청했다. 전 같으면 진작 영주권이 나왔어야 하지만 2년6개월이 지난 지금도 이민국은 "기다려라"는 대답뿐이다. 올해 말로 취업비자 기한이 만료되면 그는 꼼짝없이 귀국하거나 불법체류자 신세로 전락할 판이다.

'테러와의 전쟁'이후 이민수속과 비자발급이 한층 까다로워진 것은 물론이고 운전면허증 발급과 학교 등록, 은행계좌 개설 등도 외국인에게는 장벽이 높아졌다. 경찰.세관.이민국의 전산망이 통합되고, 신설된 국토안보부 산하로 이민국이 넘어가면서 이민정책의 우선 순위가 지원에서 단속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미 인권변호사위원회(LCHR)의 레베카 손턴 자문변호사는 "9.11 테러 이후 미국의 비자 및 이민 심사에는 '무관용(zero tolerance)'의 원칙이 적용되고 있다"고 말한다. 과거에는 예외나 정상참작 등이 용인됐지만 지금은 서류상의 사소한 실수조차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 살 때 한국에서 입양된 애런 빌림스(27)는 지난 6월 대마초 판매 혐의로 추방명령을 받았다. 양부모의 착오로 영주권만 가졌던 그는 한국에 연고도 없고 한국말도 못해 막막한 처지다. 비시민권자들의 형사범죄는 곧바로 추방을 의미한다.

이민국은 2000년 3천1백만명이었던 미국 내 이민자(출생지가 외국인 사람)수가 지난해 3천3백만명으로 2백만명 늘었지만 추방자수는 오히려 줄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는 매년 추방자의 70% 이상을 차지해온 멕시코 밀입국자들이 국경단속 강화조치로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제외한 중동계와 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추방은 계속 늘고 있다.

이민자에 대한 증오범죄.인권침해도 심각하다. 지난 6월 후세인이라는 명찰을 승객들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트랜스 스테이츠 에어라인은 중동계 승무원을 해고했다. 지난해 11월 웨스트버지니아 노스알링턴에서는 인도 시크교도의 두건을 벗겨 가위로 머리카락을 잘라버린 일도 있다.

아메리칸이슬람위원회(CAIR)에 따르면 중동계에 대한 증오범죄는 2001년 5백12건에서 지난해 6백2건으로 늘어났다. 자난 하샴 CAIR 이사는 "더 큰 문제는 소수인종에 대한 범죄를 막아야 할 경찰 등 사법당국이 소극적이라 어디 하소연할 데가 없는 점"이라고 말한다.

인종갈등은 미국의 영원한 숙제다. 따라서 '멜팅 폿'보다는 '샐러드 보울(salad bowl)'이 현실에 가깝다는 주장도 있다. 그릇 속의 샐러드처럼 혼합은 돼도 융합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민자는 미국의 경제적 활력과 문화적 다양성을 상징해 왔다. 미 스티븐스 기술연구소의 제리 헐틴 소장에 따르면 미국 의사의 20%, 전체 박사의 23%, 특허출원자의 26%가 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살고 있는 이민자들이다.

미 21세기 농업연구소의 데이브 주다이 연구원은 "중남미계 히스패닉을 중심으로 이민자들이 미 농업인력의 80%, 축산업 인력의 15%를 담당하고 있다"면서 "이들을 불법이민이라고 몰아낸다면 당장 생필품 가격이 뛰어오르고, 농토는 황폐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지난해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총재는 "불법이민자도 미국 경제에는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이민자들의 경제적 기여 효과보다는 '이민자들 때문에 미국 사회가 지출하는 추가비용이 매년 2백20억달러'(국립연구위원회), '불법이민자 자녀들로 인한 공립학교 교육비가 74억달러'(이민제도개혁연맹) 등의 부정적 수치들이 더 부각되고 있다.

노스이스턴대의 앤드루 섬(노동경제학)교수는 "최근 80년 동안 미국 경제가 지금처럼 이민자들에게 의존한 적이 없었다"면서 "이민자들이 없다면 당장 집값 폭락과 임금 폭등으로 미국의 대외경쟁력이 추락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애리조나주 툼스톤="특별취재팀">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배명복 기획위원, 김민석 군사전문위원, 심상복 뉴욕특파원, 김종혁.이효준 워싱턴특파원, 김진.최원기 국제부 차장, 신인섭 사진부 차장<bmbmb@joongang.co.kr>
애리조나주 툼스톤=신인섭 기자<shin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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